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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24 홍대 진짜파스타 문구-02.jpg


어제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읽는 순간... 가슴속에 므흣함이 마구마구 내 심장을 두드리는 이야기다...


지방에 사는 나에게 서울에 가면 가끔씩 들르게 되는 홍대거리...

그곳에서 우연하게 지나쳤을지 모르는 '진짜파스타'라는 가게에 걸린 문구가 나를 웃게 만들었다...


1. 가게에 들어올 때 쭈뼛 쭈뼛 눈치 보면 혼난다....

2. 뭐든 금액 상관없이 먹고 싶은 거 얘기해줘. 눈치보면 혼난다.

3. 매주 월요일은 쉬고 일요일은 5시30분 까지만 영업을 하니 미리 알고 있으면 좋겠구나~!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 64 전원빌딩 2층 진짜파스타)

4. 다 먹고 나갈 때 카드 한번 보여주고, 미소한번 보여주고 갔으면 좋겠다.

5. 매일 매일 와도 괜찮으니, 부담 갖지 말고 웃으며 자주 보자.


별거 없지? 당당하게 웃고 즐기면 그게 행복인 거야.

현재의 너도, 미래의 너도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P.S 만약 악용하는 분들은 적발 시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그냥... 그 가게에 걸려 있다는 문구를 다시 한번 타이핑을 하면서 읽어보고 싶었다.

다시 한번 키보딩을 하면서... 이 문구가 가진 생각을 한번 더 읽게 되었다... 그러고 싶었고...


요즘들어서... 만나는 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어른이 제 역할을 잘 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가파르게 선진국을 향해 개발되어 온 만큼... 그 이면의 허술함이 사회의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그런 문제점들이 지금 우리나라의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어서... 지켜보는 나로써는 안타깝게 생각한 지가 오래다...


그만큼... 나 부터라도 어른이 되어(?, 언제 어른이 되었지? 내 마음에는 아직까지... 20대의 열정이 그대로인것 같은데....ㅎㅎㅎ)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에 충실하자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하는 입장에서 오늘 들린 이 소식은...

아직까지도 세상은 따뜻함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아침 근무전에 이 글을 쓰게 만든다...


이런 분들이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어려운 자리를 하나씩 지탱해 주면... 우리의 사회는 훨씬 더 밝은 미래를 약속받을 수 있을듯 보인다....


나도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내가 위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1의 역할을 수행해 보자고 다짐해 본다......


2019. 7. 24. 한돌의 보금자리에서....


190724 홍대 진짜파스타 문구-01.jpg

190724 오인태님 감사문-01.jpg



190724 오인태님 감사문-02.jpg



190724 김정숙 여사님 편지-01.jpg



190724 김정숙 여사님 편지-02.jpg



190724 김정숙 여사님 편지-03.jpg



190724 김정숙 여사님 편지-0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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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족 봉사?????
1. 아픈사람(언니)를 위해 씻고 난 후 비누로 깨끗이 씻어 주세요!!!
2. 사람이 도움을 요청 할 때(귀찮거나 그가 아파서 옮기 싫어도 해 주세요)
3. 행복한 생활을 만들 때
서로를 위로하고 같이 도와 주세요. 행동 하나하나가 행복을 만듭니다.
------------------------------------------------------------------------------------------------------------------------------------------
   ???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 문에 붙어 있어서 읽게된 내용이다. ????
   글씨는 9살 둘째 현경이 글씨인데!!!!
   가만히 읽어보니 어제 언니가 병원에 다녀 온 후 독감이라서 5일동안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 나와 아내가 언니를 격리조치 하면서 벌인 일들에 대한 내용인 듯 보인다.
   아내랑 어제 많은 일이 있어, 9시 즈음에 침대에 누워 있다가 그냥 잠들어 버렸다.
   둘째에게 이 글에 대해서 물어 보니
   "응!!! 내가 쓴거야!!! 어제 밤에 엄마 아빠 주무실 때 내가 써서 붙여 놓은 거야!!!"
   그러고선 이내 또 이런다.
   "아빠!!! 언니가 아프니까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우리가 많이 도와 줘야 하지 않을까?"
 란다.
   순간 그 바쁜 아침 시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아홉살 짜리가 어떻게 저런 생각과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분명히 진담반 농담 반으로 언니를 격리조치 하면서 했던 말들이 둘째에게는 심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행동 하나하나가 행복을 만듭니다'라니!!!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있지? 하도 의아해서 아이에게 물었다.
   "현경아!!! 이런 표현은 어디에서 봤어? 책에서 읽은거야? 아니면 만화에서 봤어?" 라고 했더니
   책을 보고 있던 아이가 아빠의 감동과 표정에 그냥 아무런 표정 변화없이 무심하게는
   "아니야!!! 그냥 나 생각으로 적은건데!!!"란다.
   이제는 아이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가만히 다시 글을 읽으며 나름 아이가 생각 깊게 쓴 대자보?를 풀이해 보며 또 한번 감사한다. 이 일은 나에게 아이의 성장과 연관해서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다.
   1. 아픈 언니를 위해서 욕실과 주방의 여라 물건들은 깨끗하게 씻어서 언니가 불편하지 않아 하고, 우리 가족들에게도 전염되지 않게 주의해요!!!!
   2. 아픈 언니가 도움을 요청하면 귀찮아 하지 말고, 또 언니의 독감이 전염될까봐 걱정이되어 싫어도 언니를 도와 주세요!!!
   3. 아픈 언니를 위해 온 가족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같이 도와줘서, 행복한 생활을 위해 노력해요!!! 우리의 성의 있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는 거에요!!!!!
   다시 읽어 보아도 참 기특한 녀석이다.
   참!!! 그래서 나는 또 좋아라하고 기분이 좋아 이렇게 히죽거리고 있다.
   2016. 3. 22. 한돌의 보금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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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상품
자체개발상품
Private Brand Products

 

 

[다음 백과사전에서 인용] 

   PB상품이란 유통업체가 자체 브랜드로 제작하는 상품을 말한다. 제조업체에 생산을 의뢰한 다음 유통업체의 상표를 붙여 판매된다. 자체개발상품(Private Label Product)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PL상품이나 OL상품(Own Label Products) 등으로 불린다.

   주로 대형마트에서 PB상품을 기획·개발한다. 한국에서는 1996년 이마트에서 처음 PB상품을 출시했으며 최근에는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부분 유통업체에서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처음에는 우유나 라면, 휴지, 칫솔 등 생필품이 주로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TV나 노트북, 의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PB상품이 출시되고 있다.

   유통업체가 PB상품을 제작하는 첫 번째 이유는 가격 경쟁력 때문이다. 제조업체가 개발한 상품의 경우 가격을 더 낮추기 어렵지만, PB상품의 경우 유통업체가 기획과 개발을 진행하여 더 저렴한 가격에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통업체가 제조업체와 직접 계약을 맺어 유통단계를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중간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유통업체를 통해 판매되므로 별도의 마케팅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두 번째 이유는 유통업체 자체 브랜드를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정 PB상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제품을 판매하는 대형마트를 방문해야 한다. 대형마트에서는 이를 통해 단골을 확보하고 매출을 키울 수 있다.

   더 저렴한 제품을 공급함으로써 소비자의 선택권을 늘렸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낮은 가격을 유지해야 하는 PB상품의 특성상 일반 상품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업체간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비판도 있다. 제조업체의 경우 PB상품을 제작하면 손쉽게 유통망을 확보할 수 있으나, 기업 브랜드를 알릴 수 없어 회사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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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denee.kr/LeeBlog/NKyunsang/YJ-CS.htm

 

 

 

영주, 봉화, 울진, 영양, 안동, 의성, 청송


Home  BeitModenee  Lee'sBlog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백두대간은 태백산에 이르러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소백산으로 향한다. 백두대간은 그렇게 방향을 틀어 문경, 대관령, 지리산에 이르지만 태백산에서 계속 남쪽으로 가려는 힘이 낙동정맥을 만들어 냈다다. 낙동정맥은 태백시 매봉산에서 시작하여 봉화, 울진, 영양, 청송, 남부 알프스를 거쳐 부산 다대포까지 내려 간다고 한다. 이런 산맥의 품에 안긴 게 안동과 의성의 산과 들판이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분리되는 지점에서 생긴 힘이 엄청난 힘이 수 많은 계곡을 만들어 냈는데 이를 타고 흐르는 많은 시내들이 결국 낙동강을 이루었다.

우리가 태백산, 소백산을 구태여 나누는 곳을 이곳 원주민들은 그저 태백산이라 부른다. 그런데 고구려, 신라, 백제가 이곳에서 각축을 벌이면서 경계가 생겨났다. 그게 오늘날의 강원도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이룬 것 같다. 오늘날 소백산이 바로 그 경계다. 엄밀히 말하면 해발 1064 미터의 어래산이 삼도봉이 된다. 삼도봉은 세 개의 도를 나누는 정점이란 뜻이다. 그리하여 어래산의 북동쪽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내리가 되고, 북서쪽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가 되며, 남쪽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다. 의풍리와 남대리는 정감록에 따르면 10승지에 든다. 그만큼 살기 좋은 곳이란 말이다. 그런데 고구려나 신라나 경계를 산이 아니라 강으로 나누었으니, 한수 이북이니 한수 이남이니 하는 게 그 경계를 말한다. 단양이 바로 한수의 남북을 가른다. 한수란 한강물, 즉 남한강을 말한다. 위 사진은 어래산.

일산에서 경북의 동북방으로 가려면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경춘고속도로로 들어가서 중앙고속도로를 타는 게 가장 수월하다. 죽령터널을 지나 풍기 IC로 들어가면 곧바로 경북의 동북방 내륙으로 들어가는 5번 국도나 36번 국도를 만난다. 그러나 이건 급한 볼일이 있을 때나 취하는 코스고 자연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다른 코스를 취하는 게 좋겠다. 첫째, 단양 구경을 하고 영춘으로 들어가서 구인사와 김삿갓 유적지까지 구경한 후 의풍-남대의 멋진 풍경을 감상한 후 935번 도로를 타고 부석면으로 내려가기... 물론 시간이 되면 남대리에서 등산길을 따라 내성천의 근본인 물야저수지로 내려 가면 더 좋다. 부석사를 품고 있는 봉황산을 보게 된다. 둘째, 김삿갓 유적지를 돌아 본 후 영월쪽으로 나가 88번 도로를 타고 우구치리를 지나 경북 봉화군 춘양면으로 간다. 이 경우 봉화와 영주는 도로 서쪽으로 나와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또는 31번 도로를 타고 제천에서 영월과 태백을 거쳐 봉화의 석포면으로 나올 수 있다. 이 경우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평창에서 정선을 거쳐 태백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그 다음은 속초로 가서 7번 도로를 타고 남하하여 울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시간과 여건과 흥미에 따라 코스를 결정할 것.

영주탐방

충청북도 단양시 영춘면에서 935번 지방도를 타고 의풍리를 거쳐 남대리로 가면 935번 지방도는 어래산과 선달산 사이의 남대리에서 갑자기 산속으로 향하면서 왕복 1차선으로 줄어 든다. 덜컥 겁이 나지만 엄연한 935번 지방도이므로 달려도 된다. 임도같은 지방도가 소백산 동남쪽 산록을 탄다. 앞에서 오는 차를 조심하며 달리면 영주시 부석면에 이른다. 부석사를 구경하고 봉화군 물야면을 거쳐 봉화읍에 도착하면 36번 국도를 만난다.

 

충북 단양의 의풍리와 경북 영주의 남대리를 이루는 들판은 전국 10승지 가운데 하나이며 어래산은 충북 단양, 강원 영월, 경북 영주가 만나는 삼도봉이다. 여기는 과거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으로 두 나라가 마주친 격전지였다. 오늘날 철원 평야 같다고 할까? 그래서 고구려 장군 온달의 전설이 서려 있다. 남대리는 남한강 발원지 가운데 하나다. 남대리는 경북 땅이니 경북에도 한강의 발원지가 있는 것이다. 남대리에서 등산로를 따라 내려 가면 봉화 땅 물야저수지로 내려 온다. 물야 저수지는 내성천의 발원지인데 결국 낙동강 발원지가 되는 셈이다. 남대리의 지하수는 어떤 지점에서 한강물 또는 낙동강물로 나뉘어 지는 거다.

정감록에 기록된 10승지의 하나 남대리

영주시에서 바라 본 소백산

중앙선 열차나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경상도로 여행을 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경상도의 도시가 바로 영주다. 특히 울진으로 가려 할 때 영주 IC에서 나가 동쪽으로 가는 36번 국도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영주에서 좀 재미있는 경험을 하려면 죽령을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풍기 IC에서 나와 북동쪽으로 가는 931번 지방도를 타야 한다. 이 지방도를 타면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지나는데, 여기서 왼쪽을 보면 '미소머금고' 빵집이 있다. 영주시의 고구마 생산자들로 이루어진 영농조합이 빵과 과자를 만들어 파는 가게다. 931번 지방도는 풍기읍을 관통하는데 이때 동부리 또는 소백로에 있는 영주 한우촌을 찾아 간다. 이곳의 한우 고기는 싸고 맛이 있다. 영주한우마을 식당(소백로 1931) 등에서 파는 한우 고기는 인삼으로 절여 특이한 맛이 있다. 각 부위를 구워 주기도 하고 갈비탕, 우족탕, 육회도 판다.

 

다시 931번 지방도를 타고 들어가면 순흥면으로 가는데, 소백로 2547-16에 사적 313호인 순흥 벽화 고분이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의 고분이라 하는데 이를 통해 삼국시대의 문화 교섭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삼국 시대의 종교관과 내세관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니 대단하다. 순흥 고분을 통해 우리는 이 지역이 삼국의 각축전이 벌이진 곳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동쪽으로 가면 소백로 2657에 순흥기지떡 가게가 있다. 영주에서 유명한 막걸리 발효 떡이다. 술떡 또는 증편이라고도 한다. 순흥기지떡을 못 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먹어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단다. 그만큼 한번 먹어 보면 반한다는 뜻. 본래 그 앞의 묵밥집이 유명했는데 이제는 기지떡집이 더 유명하다. 함께 파는 순흥 인절미도 맛이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동쪽으로 가면 소백로 2740에 소수서원이 있다. 이와 붙어 있는 선비촌에서는 숙박을 해결할 수 있다. 선비촌에는 저잣거리도 있는데 선비촌종가집 식당이 유명하다. 여기서 영주의 쇠고기 국밥, 청국장, 구이정식, 비빔밥, 버섯찌개, 삼계탕 등을 맛볼수 있다. 아래는 소수서원. 본래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이었는데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 시절에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고치고 사액 서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경기체가 중 대표적인 작품이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이다. 이 죽계별곡의 실제 무대가 된 곳이 소백산 자락의 죽계구곡. 영주 풍기 땅, 옛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이름높은 그곳에 소수서원이 있고, 부석사가 있고, 그 사이에 숨어있는 계곡이다. 퇴계 이황이 영주부사로 취임한 후로 백운동서원을 사액서원 즉 소수서원으로 바꾼 다음,  바로 옆을 흐르는 죽계천을 거슬러 올라 계곡 안에 있는 절경지 9곳에 이름을 붙여놓았는데, 그 이름으로 죽계구곡이라 한다. 설에 의하면, 제 1곡을 소수서원 입구에 있는 취한대라 하고, 위로 거슬러 올라 계곡 제일 위쪽의 계곡 합류점을 중봉합류가 해서 구곡으로 했다고도 하는데...... 현재 소백산 죽계계곡에는 계곡의 시작점인 배점리 수원지 아래를 9곡으로 하고, 초암사 바로 위의 금당반석이 1곡으로 적혀있다. 소수서원 바로 앞의 순흥삼거리에서 초암사 이정표를 따라 5분정도를 들어가면 왼쪽으로 작은 마을앞 공터처럼 주차장이 있고, 그 옆으로는 성혈사 가는 길이 이어진다. 등산객이 많지 않은 때라면 이곳에 차를 세우지 않아도, 매표소 앞이나 초암사까지 차를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죽계구곡의 진면목을 보려면 이곳에 차를 세우고 걷기를 권한다. 주차장에서 조금만 오르면 상수원 관리소가 보이고, 그 아래로 죽계구곡중 9곡에 해당하는 이화동이 있다. 지금은 시멘트 포장길에 다리까지 놓여있어 그 의미조차 알수 없을 정도지만, 옛날에는 주변이 온통 배밭이어서 운치가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9곡을 지나면 양쪽이 온통 사과밭이다. 봄에는 사과꽃으로 여름에는 푸른 사과의 싱그러움이 가을에는 빨간 사과향으로 사람들을 반긴다. 사과밭 끝머리쯤에 조그맣게 소백산 초암사 매표소가 있다. 매표소에서부터 본격적인 산속 계곡이 이어진다. 매표소를 지나서 계곡과 사과밭 사이로 이어지는 산행로를 따라가면 곧바로 제 8곡 이정표가 나온다. 풀숲을 헤집고 나가면 넓은 평석옆으로 제법 그럴싸한 폭포가 쏫아지고 아래는 시퍼런 소를 이룬다. 금성반석 (金城盤石)이다. 그러나 8곡 이정표아래 위험표지판 옆으로 내려가야 8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8곡을 지나면 또다시 사과밭이 이어지고, 10여분을 오르면 7곡 청련동애다. 산동백나무 그늘을 지나 물가로 들어 가면 10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큰 바위 2개 위에 소나무 한그루와 산사나무가 그늘을 이루고, 물 건너편에는 산벗나무, 산동백이 있어 봄 풍경이 아주 뛰어나다. 7곡이라 새겨진 반석을 사이에 두고 물길이 양쪽으로 갈라져 쌍폭포를 이룬다. 7곡 바로위에 6곡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지만 사과밭이 가로막고 있어 들어가기는 수월치 않다. 6곡을 지나면 사과밭은 끝이 나고, 본격적인 계곡산행길이 이어진다. 계곡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만 들리다가 갑자기 시원한 바람과 함께 물길이 나타난다. 거리가 제 5 곡 목욕담이다. 아래에는 옛 초암사로 들어가는 시멘트 다리가 아직도 걸려있고, 다리는 이제 목욕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망대역할까지 하고 있다.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지는 물줄기가 다리밑을 지나 10여미터를 흘러가면 병풍처럼 단애을 이룬 석벽을 뚫고 지나간다. 5곡위에는 처음으로 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가 놓여있다. 다리를 건너가면 곧바로 산길로 접어들게 되고, 5분정도를 걸으면 또하나의 나무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경계로 아래쪽에 4곡 용추비폭이 위에는 3곡 백자담이 있다. 4곡 용추비폭은 이정표가 잘 안보여 얼핏 놓치기 쉽다. 그러나 구곡중에서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는 형상이라 해서 용추비폭이라 불리는데, 6미터 높이의 폭포 아래는 제법 깊은 소가 있고, 중간에 여의주마냥 큰 바위가 하나 쏫아있다. 또한 폭포위로는 보기좋은 소나무 한그루와 산동백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 한폭의 그림에 비유된다. 폭포 아래쪽으로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즐비하고 울창한 송림이 그늘을 만들어 준다. 용추비폭 바로 위의 3곡은 꼬불꼬불 바위를 타고 흐르는 와폭이다. 이 보다 와폭위의 협곡 양쪽에 오래된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이끼 낀 바위 계곡이 더 이채롭다. 3곡위로 올라서면 초암사 지붕이 올려다 보인다. 초암사 앞에 놓인 초암교를 건너면 초암사 경내 진입직전에 왼쪽으로 제2곡 청운대가 보인다. 계곡가의 큰 바위절벽에 청운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글자위에는 큰 소나무가 절벽아래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위로는 작은 와폭이 시원스레 물살을 내뱉고 아래는 잔잔한 소를 이룬 물길이 다시금 바위틈새를 비집고 작은 폭포가 되어 흐른다. 아래쪽의 바위옆에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이끼를 뒤집어 쓴채 하늘을 가리고 있다. 청운대 로 내려가는 길 위 쪽에는 초암사 종각이 있고 종각뒤로 대웅전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곳 초암사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짓기 위해 초막을 짓고 살았던 곳이라 한다. 죽계구곡의 제 1 곡은 이곳 초암사 위쪽에 있다. 대웅전 앞을 지나 국망봉을 가리키는 산행길로 접어들어 300여미터만 가면 1곡 금당반석을 알리는 이정표가 왼쪽을 가리킨다. 넓은 화강암 암반 위에 맑은 물이 흘러 꽤 훌륭한 경관을 보여준다. 위에는 작은 폭포가 있고, 폭포옆으로 죽계일곡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한 아래쪽 넓은 반석 위에는 제일수석「第一水石」이란 글귀가 패여 있지만 물이 많을 때는 물속에 잠겨 쉬이 찾을 수가 없다. 또한 물에 닳고 씻기어서 숫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순흥면에서 좀 더 동쪽으로 가면 단산면이다. 이곳에는 포도밭이 많다. 그래서 단산 포도가 유명하며 9월 중순에 포도축제가 열린다. 단산면은 부석면과 이웃한다. 부석면은 당연히 부석사에서 온 이름이다. 부석사는 서기 676년 신라 문무왕 16년에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인데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 건물을 소유하고 있대서 유명하다. 석단과 당간지주 석등 3층 석탑은 신라 때의 것이지만 무량수전(1376년)과 조사당은 고려 때의 건축이다. 문제는 차를 주차하고 부석사까지 걸어 올라 가는 거리다. 주차비도 장난이 아닌 데다 거리 또한 장난이 아니라서 부석사를 꼭 구경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부담스럽다. 여기서 가까운 봉화군에 속하는 물야저수지와 오전리 약수터를 들러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자면 915번 지방도를 타야 하는데 길이 험하다. 오전리 약수터에서 서벽리로 나가 88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가면 봉화읍으로 간다. 이곳에서 36번 국도를 만나면 울진으로 간다. 88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가면 우구치 계곡을 지나 강원도 영월 땅으로 들어간다. 아래 사진은 부석사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

이 밖에도 영주시에서 찾아 볼 만한 곳은 평은면 수도리의 무섬마을과 봉현면 대촌리의 솔향기마을이다. 이쪽을 둘러 보려면 예천군 보문면의 학가산 자연 휴양림에 여장을 푸는 게 좋을 것이다. 예천IC에서 우래리를 찾아가면 된다. 영주에서 우리가 빠뜨릴 수 없는 게 바로 영주 분처상이다.

영주 분처상(分處像)의 비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속칭 왕머리) 분처바위에 분처상과 그 좌측에 암각된 '도마'라는 히브리어 글자가 있다고 한다.

 

9세기 암각상에 예수제자 이름이… 18세기 머리 없어진채 발견

예수님이 승천한 뒤 12사도 중 한 사람인 토마가 동방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인도에 와서 고대 동방기독교의 첫 선교활동을 펼쳤다는 것은 거의 정설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그가 지구의 동쪽 끝 한반도에 왔다간 흔적을 남겼다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놀라게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그럴 법한 일이 일어났다. 1987년 8월 어느날 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 분처바위에서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간 암각상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기독교 관련상이라느니, 심지어 토마상이라느니 하여 충격적인 화제를 던졌다. 특히 기독교계에서는 이 뜻밖의 일을 대서특필하고 흥분에 설레었다. 성역화 논의까지 나오는 가운데, 지금도 찾는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유적을 발견한 지 3년 뒤 필자는 현지의 한 중학교 교장의 안내를 받으면서 영주에서 안동으로 넘어가는 비포장 고갯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길가에서 오솔길을 헤집고 한참 들어가서야 상이 나타났다.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잡은 상은 나무숲 속에 묻혀있었다. 그로부터 4년 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과 함께 다시 가서 좀더 자세한 현장조사와 상 표면에 나타난 명문을 탁본했다. 돌아와서는 탁본과 사진자료에 관한 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고, 그를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견해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8년이 2002년 여름, 한 텔레비전 방송국 취재팀과 함께 다시 찾았다. 어느새 길은 깔끔하게 포장되고, 주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관계기관의 협조 속에 1박 2일간의 심층 취재를 마치면서 그해 가을께 문화 한마당에 곁들여 학술모임도 열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 학술모임만 가졌어도 오늘의 이 글은 좀더 명석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토마’‘야소화왕’글자 새겨

분처바위에 있다고 하여 ‘분처상’(혹은 ‘토마의 분처상’, ‘토마상’)이라고 하는 이 암각상은 그 터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속칭 ‘왕머리’라고 하는 왕유동(王留洞: 왕이 머무른 마을이라는 뜻)은 고려 31대 공민왕이 중국으로부터 처들어온 홍건적의 난리(1361년)를 피하기 위해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손·발모양 기독교양식 뚜렷

상은 높이가 족히 5m나 되는 대형 암각상이다. 상면(像面)과 암면(岩面)에는 3점의 음각한 명문이 있다. 그 한 점은 상의 좌측 암면에 네모꼴로 새겨진 4자의 ‘도마’라는 히브리어 글자이고, 다른 두 점은 상면의 하단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와 ‘명전행(名全行)’이란 한자 명문이다. 이러한 명문과 더불어 특이한 조형기법과 문양이 확연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아무런 명문도 없는 불국사 출토 돌십자가나 경주 출토 성모 마리아 소상에 비하면 여러 모로 고증이 가능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이 낯선 상에 관한 학제간의 종합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무어라고 단정적인 결론은 내릴 수가 없다. 이 시점에서 논급할 수 있는 것은 보통 불상과는 다르며, 기독교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론과 몇 가지 문제점이다. 이것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와 상관 지을 수 있는 논의라서 더욱 주목된다.

분처상을 기독교와 연관 짓게 되는 근거는 우선, 조형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일견하여 눈에 띄는 것은 수세인데, 왼손가락 끝은 빗장뼈에 댄 채 손등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외반(外反:바깥쪽으로 돌림)하고 있어 불상의 수인(手印)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수세는 1908년 중국 둔황에서 발견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 즉 경교(景敎)의 인물상(당나라 말 제작, 일부 학자는 그리스도상이라고 주장)에 나타나는 수세와 비슷하다. 수세뿐만 아니라, 상의 구도나 복장의 화려함도 두 상이 서로 유사하여 불상과는 구별된다. 발가락의 노출도 기독교(예수)상의 보편적 기법이다.

특기할 것은 필자의 초보적 관찰로는 상의 가슴 부위에 양각된 십자가 모양이 보인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문양에서도 그 근거가 엿보인다. 상의 옆구리와 하부에 음각된 문양 중에는 목단이나 장미 같은 꽃무늬가 보인다. 그리고 분처상의 고리형 목걸이 문양과 겉옷의 가로줄 문양은 둔황 경교화상의 목걸이나 겉옷 문양을 방불케 한다. 이와 함께 히브리어의 ‘토마’란 글자나, 한자의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은 비록 그 암각 시기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이 상이 기독교와 관련된 상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인근 주민들의 전언도 기독교상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상을 지켜봐 온 주민들은 종래 이 상 앞에서만큼은 물상숭배 같은 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일치하게 증언한다. 사실 현장에서 그러한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불상이나 기타 상서롭지 않은 대상물만 있으면 예외없이 불공을 드리거나 기복하는 한국인들의 전래 관행에 비춰보면 짐짓 의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마 물상숭배를 불허하는 기독교 같은 유일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짐작해 본다

노출된 상의 발가락과 그 밑의 여러가지 꽃문양

 

현대히브리어 사용 등은 의문

이상의 몇 가지 근거로 미루어 분처상이야말로 기독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 암각상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나아가 이 상을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를 시사하는 증거유물로 일단 추정해 봄직하다. 그러나 상의 실체를 밝히는 데서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가 포착되고 있다.

그 중 한가지는 명문의 내용이다. 전문가들의 해석에 의하면, ‘토마’란 음각자는 현대 히브리어 문자라고 한다. 여기서의 ‘토마’는 예루살렘의 초기교회 시대인 1세기 중엽에 인도 서남부와 중국까지(중국까지 왔다는 설은 부정됨) 와서 전도활동을 했다는 예수의 12사도 중 한 사람인 토마일 것이다. 따라서 분처상을 토마상으로 본다면 히브리어, 그것도 현대 히브리어로 글자를 새겼다는 것은 시기성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례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상의 조성 연대가 9~10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발견된 토마 관련유물 중에는 히브리어로 명기된 유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1547년 남인도 서해안의 성 토마산에서 발굴된 석비에는 십자가와 함께 현지어인 펠레비어로만 비문이 씌어있다. 그리고 토마의 시대는 물론, 11세기에 이르러 동서 교회가 결별할 때까지만 해도 고대 히브리어가 상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토마’라는 현대 히브리어 암각문은 상이 조성된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토마‘라는 글자보다 더 문제시되는 것은 이른바 ‘야소화왕인도자’란 명문이다. ‘야소화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존칭이며, ‘인도자’는 사도나 전도자로 풀이된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야소’란 한역(漢譯) 지칭의 출현시기가 문제다. 781년에 중국 시안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칭하고 있다. ‘야소’라는 말은 중국 명대 중기에 서방 카톨릭이 중국에 유입되면서부터 비로소 쓰게 된다.

한국의 경우, ‘원효문집’에서 예수를 불교식으로 ‘법왕자(法王子)’라고 칭한 실례는 있으나, ‘야소’로 한역하거나 음사한 적은 없으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전무하다. 따라서 한자 명문도 히브리어 글자처럼 상이 조성된 후에 보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명전행’이란 명문에 관해서는 가까이에 있는 순흥면 읍내리 고분 서벽에 고구려인 ‘전행(全行)’이란 같은 이름의 석장이 등장하는 점을 들어 당대의 명장인 이 전행이 분처상도 제작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400년께 고구려 광개토왕이 영주와 순흥, 안동 등 소백산 내부 지역을 일시 통치하였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상황론적으론 그럴 법한 설이다. 그러나 전행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어서 단정은 이르고 숙고가 요망된다. 그밖에 ‘전행’을 ‘전차(향기나는 풀에 버금가다라는 뜻)’라는 석장 전행의 호로 해석하는 이도 있는데, 증거가 미흡하다

고대기독교 전파 중요실마리

한마디로, 분처상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와 관련이 있을 개연성은 짙지만, 아직 연구가 미흡해 무어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 이 글은 연구의 단서일 뿐이다. 분처상의 해명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인 두부가 떨어져나감으로써 실체를 밝히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몇몇 주민의 얘기로는 임란 때 왜군이 상의 목을 잘랐는데, 30~40년 전만해도 두부가 상 앞에서 딩굴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 곳 어딘가 묻혀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두부의 수습과 복원이 급선무다. 아울러 관련학계의 진지한 협동연구도 요망된다. 오늘도 분처상은 그 무언가를 증언하면서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다. 무언 중의 유언, 그것이 바로 역사어다. 이 역사어를 알아듣지 못해 생긴 것이 이른바 ‘역사의 비밀’이다. 역사의 비밀은 역사의 심연 속에 일시 가려진 것일 뿐, 영원은 아니다. 그 심연을 파헤치다 보면, 어느날엔가는 그 비밀이 허무해지는 법이다. 분처상의 비밀도 그러할 것이다. <정수일교수/한겨레 2005.1.3>

최초 한국 기독교인은 가야시대 허황옥이었다.

(AD. 49년-삼국유사 가야국편)

그녀는 인도에서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에 의해 전파된 인도기독교를 통해 얘수님을 영접하였다.(출전 - 도마행전) 그녀가 가져온 종교는 도마기독교인 인도기독교였다. 인도기독교는 토마스기독교라고 불리며, 예수의 12제자 중 한사람인 도마가 인도에 와서 선교한 동방기독교이다. 현재 인도의 기독교인은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의 4배정도로 많은 3500만명 정도 된다. 현재 남아 있는 기독교 유적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도2동 왕유동 도마 석상(문화재자료 제474호), 경주 불국사 돌 십자가, 경주 마리아 상 등이 있다. 영주 도마 석상은 히브리어로 도마라고 새겨져 있고, 예수의 한자어인 야소(耶蘇)가 새겨져 있다.

그녀는 인도 태양황조의 아유타왕국의 공주로 AD. 49년7월27일에 항로를 통해 가야국 주포촌(도두촌)의 기출변 해변에 들어왔다. 아유타국은 현재 인도의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 읍을 말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허황옥이 이르기를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이름은 허황옥이라 하며 나이는 열여섯이옵니다. 금년5월경이었습니다. "제 아버님 꿈에 하나님이 나와 말씀하시길. '가라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낸 이로 신령스럽고 거룩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으나 여러해 동안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는 공주를 보내어 그의 아내로 삼게 하라' 하셨다 합니다. 부모님은 꿈을 깬 뒤에도 하나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며 빨리 수로 임금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말씀을 좇아 그길로 하나님이 정하신 제 낭군을 찾아 아득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보잘 것없는 얼굴로 귀하신 얼굴을 뵙게 되었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라고 했다.

가야국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허황후가 되었다.(유적 - 파사사탑. 쌍어문, 물고기문양 등) 그 후 기독교는 신라시대 당나라를 통해 경교가 들어왔다.(유적 - 경주 불국사의 십자가 문양) 경교은 동방기독교의 일파로서 네스트리우스파라고 부르며 당나라시대 635년에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졌으며 250년간 번성했다.(유적 - 중국 당 현종 때 대진경교유행비가 있다).

영주군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기재된 내용: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 문화재자료 제474호, 불상 전체높이 5.76m, 전체 폭 4.5m, 佛身高 4.26m, 佛身幅 2.15m, 絹幅 1.6m, 소재지 :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 산 87-1. 이 불상(佛像)은 평은면(平恩面 ) 강동리(江東里) 왕유(王留)(왕머리)마을에서 당곡골로 넘어가는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왕유마을은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蒙塵)을 가던 공민왕이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불상(佛像)을 부처바위라고 부르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여기는 불상(佛像)을 이룩할 데가 못되니 안동(安東)땅에 가서 자리를 찾으라’하여 미완성(未完成)으로 남겨둔 채 제비원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였다는 말과, 여기 불상(佛像)의 머리를 떼어다 제비원 불상(佛像)으로 옮겼다고 하나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전체높이가 5.76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로 조각양식은 이웃한 안동 이천동 마애불입상(일명 제비원)과 구미 황상동 마애불입상, 충주 미륵대원 등과 같이 고려초에 유행하던 거석마애불 계열의 불상이다. 불두(佛頭)는 절단(切斷)되었는데 절단(切斷)된 목부분 상단(上段)에 턱의 일부가 남아있어 원래(原來)는 불신(佛身)과 한 돌에 조각(彫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잘린 부분을 평평하게 다듬은 흔적(痕迹)으로 보아 불두를 다시 조성하여 안치하였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불두(佛頭 )뒷편 바위면에는 두광배(頭光背)의 조각선(彫刻線)이 2겹 남아있는데, 광배 내부(內部)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불두(佛頭)가 환조(丸彫)로 조각(彫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암면(巖面)의 상태에 따라 어깨와 가슴부분은 고부조(高浮彫)로 새기고 하체(下體)는 선각(線刻)으로 처리하였다. 발아래는 운문(雲紋)과과 3겹의 연화대좌( 蓮華臺座)가 조성(造成)되어 있으며 대좌위에는 불상의 발가락만이 조각되어 있어 특이하다. 수인(手印)은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가슴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가슴 위에서 손바닥이 밖을 향하는 특이한 자세를 하고 있는데 오른손에 잡고 있는 연꽃가지가 왼쪽 가슴위에 놓여 져 있다. 불상(佛像) 우측(右側 ) 중하단부(中下段部)에는 명문(名文)이 상하(上下)로 두 글자 새겨져 있는데 정확히 판독(判讀)할 수 없다. 또한 불상(佛像 )좌측(左側 )상단부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감실형(龕室形) 조각(彫刻)이 4개 배치(配置)되어 있는데 이제까지는 다른 곳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것 이여서 매우 주목된다.

자연암면(自然巖面)을 최대(最大)한 이용하여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는 과정(過程)에서 조각의 깊이나 두께가 달라졌고, 좌우(左右) 균형(均衡)이 다소 맞지 않으나 당시 유행하던 거불상계열(巨佛像系列)의 조각수법(彫刻手法)이 부조(浮彫)와 선조(線彫)인데 반해 이 불상에서는 환조(丸彫)의 불두(佛頭)에 두광배(頭光背)까지 갖추어 다양(多樣)한 조각기법(彫刻技法)을 시도(試圖)하고 있으며, 발아래로는 3겹의 운문연화좌(雲紋蓮華坐)가 배치(配置)된 점 등은 매우 특이(特異)하여, 당시(當時) 조각기법(彫刻技法)을 연구(硏究)하는데 좋은 자료(資料)로 평가( 評價)되고 있다.

경상도에는 강물이 산에 막혀 물돌이 마을을 만들어 낸 곳이 여럿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 하여 무섬마을이라 하는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마을 주변을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휘돌아 흐른다. 무섬마을의 역사는 16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남(潘南) 박씨인 휘(諱) 수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후 선성(宣城) 김씨가 들어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있다. 40여 가구 전통가옥이 지붕을 맞대고 오순도순 마을을 이루는 무섬마을은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이 오롯이 남아있다. 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가 마을에 들어와 건립한 만죽재(晩竹齎)를 비롯해 총 9개 가옥이 경북문화재자료 및 경북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역사가 100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남아있어 조상들의 자취와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마을 내 고택과 정자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고풍스런 옛 향취를 풍기고, 30년 전까지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 외나무다리가 마을의 대표 상징물로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봉화탐방

영주에서 86번 국도와 영동선 철도가 들어가는 봉화는 과거 금강송 목재와 송이와 각종 산약초 등 임산물을 생산하는 봉성현으로서 주가를 높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봉화는 여전히 생소한 오지로 느껴진다. 영화 <워낭소리>는 그 오지됨을 더욱  더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워낭소리 촬영지는 상운면 하눌리 산정마을. 하지만 낙동강이 지나고 내성천이 발원한다는 점에서 봉화는 영양이나 청송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 은대봉의 너덜샘에서 발원하여 부산 하단을 지나 남해로 흘러 간다. 그 길이는 525킬로미터다. 너덜샘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구비구비 흘러 봉화군 석포면으로 들어간다. 이후 낙동강은 봉화군의 동쪽 외곽을 구비구비 흐른다. 즉, 소천면과 재산면과 명호면을 지나 청량산을 굽어 흐르는 것이다. 낙동강은 이후 안동으로 들어가서 도산면을 지나 안동호에 이른다. 영동선 철도는 영주에서 출발해 봉화읍을 지나 법전면으로 들어가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서 태백에 이르게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즐기는 영동-태백의 관광 열차는 분천, 승부 등을 지나는데 낙동강 협곡에 세위진 마을들이다.

해발 1,236미터의 선달산 아래 물야 저수지에서 발원하는 내성천은 물야면을 지나 봉화읍을 관통하여 영주시 문수면 무섬마을을 지나 예천으로 구비구비 흘러 들어간다. 최근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와 용혈리에 영주댐이 세워져서 2014년부터 물을 담으면 평은면 금광리, 강동리, 면소재지, 중앙선 승문-옹천 구간이 수몰된다. 영주를 지난 내성천은 낙동강을 북쪽에서 평행으로 흐르다가 문경시 영춘면 삼강에서 드디어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그 길이는 110 킬로미터가 넘는다. 내성천은 봉화읍에 내성리라는 마을 이름을 남겼는데 이곳에서 매년 7월 말 8월 초에 은어 축제를 연다. 그러나 영주댐이 생기면 이 축제도 막을 내리게 될 지도 모른다.

봉화의 달실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 즉 '금계포란'의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풍수지리상 영남의 손꼽히는 명당 자리로 삼남의 4대길지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또한, 마을 주위로 물길이 돌아나 있는 이수삼산의 형태로 물줄기 두 개가 만나기 때문에 홍수가 나도 범람하는 경우가 적다고 한다. 달실마을은 안동 권씨의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충재 권벌로 알려져 있으나 실지 이 마을에 제일 먼저 정착한 이는 권벌의 5대조이다. 충재 권벌 이후로 마을이 번성하여 그를 입향조로 알고 있는 이가 많아진 것이다. 멀리 국도에서 보아도 오래된 고가가 쉽게 눈에 띄이는 모양새가 반가의 집성촌임을 짐작하게 하는 달실마을은 충재 종택이 있는데, 이 충재 종택에는 5개의 서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262호인 근사록, 261호인 충재일기 7책, 보물 896호인 중종에게 하사받은 책들, 901호인 호적단자, 902호인 서첩과 글씨인데, 책을 좋아했던 선비의 종택에 어울리는 보물인 듯하다.

달실마을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이 찾는 곳은 청암정이다. 청암정은 종택에 딸린 정자로 연못 한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지어져 있다. 아마도 낯익은 모습이 영화 스캔들의 촬영 장소이기 때문인 듯하다. 영화 속에서 이미숙이 등장했던 장소가 바로 청암정이다. 또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포스터에서 신윤복역의 문근영과, 김홍도역의 박신양이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던 돌다리도 청암정이다. 청암정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청암정이 있는 바위가 거북 모양이라고 한다. 처음 청암정을 지을 당시 청암정의 안쪽방에 온돌을 만들었는데, 지나던 고승이 거북의 등에 불을 피워서는 않된다고 말을 전하는 바람에 온돌을 없앴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삼계서원이다. 충재 권별을 배향하고 있는 곳이다. 달실마을의 집들을 보면 뒷집들에 비해 앞집들은 조금씩 그 몸을 틀어 지은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뒷집들의 시선을 터주기 위해서 인듯 하다.

달실마을의 행정 지명은 유곡리다. 하지만 유곡리 보다는 '달실 마을'이 더 많이 알려진 이름이고, 그보다 더 많이 알려진 이름이 바로 한과 마을이다. 이곳 달실 마을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어준것이 바로 달실 한과로, 전량 주문 생산을 하고 있는데, 명절 등 성수기에는 주문량을 맞추지 못해 일찍 주문 접수를 마감한다. 다리를 하나 건너 왼쪽으로 길을 틀어 충재 권벌 유적지로 가다보면 곧바로 '달실종가 전통유과'라는 간판이 붙은 슬레이트지붕의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달실 마을 한과를 만드는 명소로, 유곡리 부녀회에 소속된 십 여명의 주민들이 매일 이곳에 모여 한과를 만든다. 달실 마을에 방문을 하면 이 달실 한과를 맛보며, 한과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5백년 된 전통의 맛 그대로인 한과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달실 마을은 녹색 농촌 체험 마을로 지정이 되어, 고택 체험과 함께, 옛 선비 체험, 한과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체험관을 조성해 놓았다.

우구치리 이야기

단양의 영춘면에서 김삿갓 유적지를 구경하고 영월쪽으로 가다가 88번 도로를 만나면 우회전 한다. 경북 봉화군 우구치리로 간다. 경상북도와 강원도가 경계를 이루는 곳인데 이곳에 주석, 금 광산이 있었다. 과거에는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많이 살았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계곡이 남아 있다. 우구치리의 아름다운 이름들... 새터ㆍ신기ㆍ신기리 하금정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인근에 금ㆍ은ㆍ동 광산이 많이 생겨나면서 이곳에 종사하는 광부들이 새로운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쉰팽이골 시기는 알수 없으나 원시광산에서 갱구가 무너져 광부가 몰살을 당하였는데 그 인원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당시 국상을 당하여 쓰고 다니다가 갱구밖에 벗어놓은 50여개의 패랭이 수를 보고 죽은 인원을 추정하여 50여명이 죽었다하여 쉰피리골 또는 쉰패랭이골이라고 하였다 전해지고 있다. 상금정(上金井) 금정이라는 명칭은 일제시대에 광산명칭을 일본인들이 금정광업소라 칭하였으며, 상ㆍ하로 나누는데 금정광업소가 있는 곳을 상금정이라하고 우구치 입구 자연부락을 하금정이라 한다. 상시장 금정광산이 한창 번성했던 1933년 일제시대에는 상시장을 중심으로 인근 촌락에 이삼천세대 이상이 살았다하며, 이곳에서 생활필수품이나 광산에 필요한 공구등을 파는 상설시장이 생겨났으며 상시장과 하시장은 우구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대구촌, 변전소골  일제시대때 유래된 말로서 전국 각지에서 광부들이 많이 모여 살았는데 대구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호(四壕) 금광을 뚫는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사호와 칠호에서 많은 금이 나와서 붙여진 지명이며, 바깥에서 보면 두 개의 갱(사호, 칠호)이 있으며 안에 들어가서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하금정(下金井) 옛날에 이곳에 사금이 많이 났다고하며 또한 금이 샘같이 많이 난다고하여 금정이라 하였으며 상ㆍ하금정으로 나뉘는데 아래쪽 마을을 하금정이라 한다. 샘골 광산이 여러 곳이 있어 물이 좋지 않았으나 이골은 물이 맑고 좋아서 샘골이라 하였다. 구점골 삼국시대부터 이곳에 광산이 형성되어 금ㆍ은ㆍ동이 났다고 하는데 특히 은이 많이 생산되어 이곳 점포에서 현물을 매매하였으나 광산이 쇠퇴하자 구점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점골에는 200년된 면 보호수(소나무)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이곳 우구치 발전을 위하여 20여년동안 노력하시다가 돌아가신 정석범 이장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와흥 구전에 의하면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와흥이라고 불렀으며 골이 깊고 넓으며 사방으로 높은산에 둘러쌓인 마을로 지금은 한농복구회라는 단체가 모여살고 있으며, 이 곳 진입로는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로 와흥마을을 가자면 촌각에도 강원도와 경상도를 여러번 왔다갔다하여야 한다. 그리고 와흥입구에는 호박소가 있는데 우구치지역중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 노루목 옛날에는 장터벌이라고도 불렸으며, 이곳이 한창 흥성할 때에는 아침밥을 지을 때면 쌀뜨물이 30여리를 이어졌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큰 촌락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진터밭 임진왜란때 의병들이 왜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진을 치고 오랫동안 거주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띠밭 비가 올 때 띠라는 재료로 우의를 만들어 입었는데 띠라는 풀을 엮어 메어 어께에 걸치고 다녔으며 띠라는 풀이 많아서 불려진 지명이다. 조제 경상도와 강원도 영월군과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이 마을 중간을 흐르는 내를 중심으로 경상도 조제와 강원도 조제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두마을을 합쳐서 조제라 한다. 가는골 경상도 조제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길게 늘어진 좁은 골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화전민 철거로 지금은 거의 떠나고 몇집만 살고 있으며 햇빛이 잘들어 아늑한 곳으로 뒷산은 군유림이며 강원도와 경계지역으로 봉화군에서 매입하여 행정재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우구재ㆍ우구치(牛口峙)ㆍ우구치리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인 우구재 밑이 되므로 우구재 또는 우구티라 하였으며 재를 넘어가는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이라 하여 우구치(牛口峙)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춘양면 서벽리 일부를 병합하여 우구치라 하였으며 봉화군 춘양면에 편입되었다.

봉화는 소나무가 많아 곳곳에 소나무 반출 금지 경고문이 붙어 있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금강송은 춘양역에서 기차에 실려 나갔기 때문에 춘양목이라고도 한다. 춘양목이 명성을 날릴 때에는 굽은 데 하나 없이 하늘로 쭉 뻗은 소나무들이 문수산에 가득했다. 그렇지만 남벌로 인해 귀해졌고 지금은 축서사가 있는 문수산 반대쪽에 위치한 금강송 군락지에서만 겨우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을 통칭 서벽리 금강송 군락지라 한다. 봉화의 금강송은 우수해서 문화재 보수용으로 사용되어 관리가 철저하다. 그러나 최근에 제한적으로 개방되어 숲 해설가와 함께 솔 숲 트래킹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서벽리 금강송 군락지는 춘양읍에서 영월로 가는 88번 도로를 따라 가다 서벽삼거리에서 오전약수 이정표를 보고 915번 지방도로를 타면 된다. 우구치리에서 오면 우회전이고 춘양읍에서 오면 좌회전이 되겠지? 10여 분 달려야 한다. 서벽마을에 이르러 약 1.2km 정도 걸으면 드디어 군락지에 이른다. 어른 걸음으로는 20분 정도. 대형버스는 마을에 세워두고 걸어 올라가야 하지만 작은 승합차나 승용차는 숲이 시작되는 곳까지 올라갈 수 있다. 금강송 군락지로 가는 임도 변에는 사과밭, 도라지밭, 코스모스밭 등이 있다. 백두대간 남쪽에 위치한 서벽마을은 글자 그대로 서쪽의 벽(壁)이라는 뜻이다. 주실령이 뚫리기 전까지 이 마을은 서쪽의 옥돌봉(1242m)과 문수산(1205m) 줄기에 가로막혀 오지 중 오지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금강송 군락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금강송 군락지 가까이 오면 짙은 솔향이 코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시켜 주기 위해 간벌(間伐)을 하게 되는데 간벌을 하면 금강송 숲 여러 곳에 건장한 남성의 허벅지 굵기만한 소나무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고 짙은 솔향과 송진 냄새는 고요한 숲 속에 가득해 진다. 소나무 숲 산책을 시작하면 소나무 밑둥에 황색 페인트로 선을 그리고 일련번호를 적어 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금강송 군락지 안에는 어른 한두 명이 겨우 껴안을 수 있을 정도로 굵은 소나무가 1500여 그루 정도 있는데 이 금강송들이 궁궐이나 전통사찰 등 문화재의 보수 및 복원을 위한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된 것 들이다. 군락지에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임도들이 있어 솔향에 취해 개방된 길을 따라 자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주말에만 운영되며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영주 국유림관리소 054-630-4041. 트래킹 코스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산림문화체험장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목공예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봉화는 강원도 양양과 함께 전국 최대의 송이버섯 생산지다. 이곳에서 비교적 싼 값으로 송이 요리를 먹을 수 있으므로 알아 보실 것. 봉화 봉성면에서는 봉성리의 솔잎 돼지숯불구이와 우곡리의 다덕약수로 끓인 백숙이 좋다고 한다.

춘양면 소재지의 재래시장 안에 있는 동궁식당의 엄나무순 돌솥밥도 별미다. 돌솥에 불린 쌀과 엄나무 순 100g을 은행과 함께 넣고 지은 게 ‘엄나무순 돌솥밥)’이다. 춘양은 일명 ‘개두릅’이라고 하는 엄나무 군락지의 자생밀도가 아주 높은 지역이다. 돌솥의 밥을 김 가루가 담긴 대접에 옮겨 송이간장 소스를 넣고 비볐다. 나물 향과 함께 보드라운 식물성 촉감이 구강 내벽에서 춤을 추다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다. 엄나무 순의 향과 함께 송이버섯의 향기가 입 안에서 잘 어우러진다. 밥도 밥이지만 함께 나오는 곰취 장아찌, 송이 장아찌, 엄나무 순 장아찌, 표고버섯 볶음, 우엉조림, 두릅나물 등속의 반찬은 도시에서는 여간해서 먹기 어려운 산촌 고유의 풍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도시 사람들이 환장한다는 물김치도 몇 번 숟가락이 가질 않은 것 같은데 한 그릇이 금방 바닥을 보인다. 먹음직스런 구수한 청국장찌개가 끝내 토라졌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배는 불러오고 밥그릇에 밥은 다 비었는데… 밥을 먹는 동안 돌솥에 물을 부어 밥을 다 먹고 난 뒤 숭늉으로 먹는다. 엄나무 순으로 만든 메뉴는 이밖에도 ‘엄나무순 송이돌솥밥(1만5000원)’, 엄나무 비빔밥, 엄나무 삼계탕, 엄나무 식혜 등이 있다. 엄나무순 송이돌솥밥은 송이버섯을 넣어 송이를 좋아하는 고객들이 즐겨 찾는다. 엄나무 비빔밥은 엄나무 순을 다른 재료들과 함께 비벼먹는 메뉴로 앞으로 돌솥밥과 함께 엄나무 시리즈의 쌍벽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춘양면 애당리의 애당식당... 묵의 달인이라 하는 할머니가 만드는 묵이 맛있다고 한다. 춘양면소재지와 서벽리 황금송 중간 지점. 우구치리에서 가면 애당리 묵집이 먼저 나오겠지.

 

춘양면에는 금강송으로 만든 오래된 반가(班家) 만산고택이 있다. 을사조약 체결 후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한 강용(1846~1934)이 지은 집으로 전통적인 영남의 양반집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문화재이지만 지난 2005년부터 고택체험을 원하는 방문객에게 칠류헌과 서실을 개방하고 있다. 하룻밤 묵어가는 비용은 칠류헌 10만원(5인기준). 서실 5만원. 주문하면 종가댁 아침상도 맛볼 수 있다. (문의 054-672-3206)

봉화읍에서 동남쪽으로 29km, 안동시에서 동북쪽으로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청량산(870m)은 다소곳이 숨어 있는 산이다. 금탑봉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봉우리 12개, 동굴 8개, 대 12개와 신라 문무왕 3년(663년) 원효대사가 세운 청량사를 비롯한 절터와 암자, 관창폭포 등 수많은 볼거리를 갖고 있다. 청량산도립공원 표석 뒤로 퇴계의 '청량산가'시비가 있으며, 청량산행에서 이것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청량산은 퇴계뿐만 아니라 원효, 의상, 김생, 최치원 등 유학의 대가들이 찾아와 수도했고 그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남아 전설이 되었다. 퇴계의 청량산가에 나오는 육육봉은 주봉인 장인봉과 외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금탑봉, 축융봉의 12 봉우리를 말하며, 모두 바위 병풍을 두른 듯이 산 위에 솟아있다. 또 신라 명필 김생이 서도를 닦았다는 김생굴을 포함해 금강굴, 원효굴, 의상굴, 방야굴, 방장굴, 고운굴, 감생굴 등 8개 굴이 있다. 옛날 김생이 굴에서 9년 동안 서도를 닦은 후, 스스로 명필이라 자부하고 하산할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한 여인이 나타나 자신도 9년 동안 길쌈을 했으니 솜씨를 겨뤄보자고 한다. 이리하여 컴컴한 어둠 속에서 서로 솜씨를 겨루었는데 길쌈해 놓은 천은 한올 흐트러짐이 없으나 김생의 글씨는 엉망이었다. 이에 김생은 다시 1년을 더 정진한 후 세상에 나와 명필이라 칭송받게 되었다는 것. 어째 한석봉 이야기와 비슷해...

이 밖에도 최치원이 글을 읽었다는 독서대를 비롯하여 어풍대, 풍혈대 등의 12대가 있고, 최치원이 마시고 정신이 총명해졌다는 총명수와 감로수 등의 약수가 있는데 물맛이 달고 시원하다. 역사적 유물로 청량사와 응진전, 오산당, 청량산성 등이 있다. 오산당은 김생굴 앞에 있는데, 퇴계가 문인들과 강론하던 곳에 후학들이 세웠다고 한다. 청량산 남쪽 축융봉에는 옛 산성터가 남아 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와 쌓았다고 하는 청량산성이다. 청량산 주변의 매호 유원지와 이나리강 래프팅이 유명하다.

경북 봉화는 안동쪽으로 발달이 되어 있다. 달실 마을도 그렇고 다른 여타 안동 권씨 안동 김씨 가문들도 그렇고... 다 안동 쪽을 바라 본다. 봉화에서 청량산을 넘으면 바로 안동시 도산면의 도산서원이 나타나는 게 재미있네. 봉화읍은 워낭소리 촬영지. 안동 남후에서 동으로 가면 영양과 울진. 안동 길안에서 또는 일직에서 의성 후평을 거치면 곧 바로 청송. 청송에서 주왕산을 끼고 산맥을 넘으면 영덕.


울진탐방

산과 계곡이 많은 곳에는 고개도 많은 법. 사람들은 그 고개를 이용해 많은 길을 닦았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울진의 십이령 길인데 이 길은 금강송 군락지를 지난다. 울진군은 금강소나무숲길이라 해서 모두 4개 코스를 개발해 놓았다. 그래서 안내원과 함께 제한 인원이 제한된 코스만 들어갈 수 있다. 사전 예약 필수, 아침 9시 출발, 화요일과 겨울은 예약 불가.

팁) 금강송 또는 강송이라 부르는 소나무는 본디 금강산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금강송이 적송, 즉 붉은 소나무의 하나라 하지만, 곧게 또한 높이 자라고 누런 빛이 도는 특성이 적송과 달라 별종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우리가 흔히 보는 구불구불하게 자라는 소나무를 육송이라 한다. 바닷가의 소나무를 해송이라 하는데 해송은 소나무의 종류는 아니다. 금강송을 춘양목이라고도 하는데, 영동선 철도를 깔고 봉화의 춘양역에서 금강송 목재를 반출해 갔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금강송은 금강산 태생이지만 이남으로 번졌다고 한다. 특히 낙동정맥을 따라 남하하여 청송까지 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태백, 삼척, 봉화, 울진, 영양, 청송등의 낙동정맥에 속한 산지에서 모두 금강송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 봉화와 울진의 산악지대가 금강송 군락지다. 과거 보부상길이라 하는 십이령길 일대를 말한다. 금강송은 궁궐 등 대형 목조물에 많이 사용이 되는데 10미터쯤 되는 목재 하나의 가격이 자그마치 6,000만 원이다. 그리고 금강송 군락지 바닥에서 나오는 금강송이버섯은 덤이다.

십이령 길은 불영계곡과 이어 진다. 그러므로 십이령 길이 시작되는 심근리 입구부터 서쪽으로 가는 36번 국도는 불영계곡과 관련이 없다.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뿐이다. 산중으로 조금 들어가면 국립 통고산 자연휴양림이 있다. 통고산은 십이령 길을 품고 있는 백병산 남쪽에 있는 산이다. 통고산은 서쪽에 있는 횡병산과 만나 왕피천 계곡을 이룬다. 여기에 917번 지방도가 나있다. 917번 지방도를 타고 동쪽으로 가다 보면 남쪽으로 꺽이는 지점에 수하계곡이 있다. 이 수하계곡은 반딧불이 보전 지역으로 영양군에 속한다. 수하계곡 상류에는 군립 송방 자연휴양림이 있다. 이 휴양림 위쪽으로도 보부상 길이 나있어 울진의 해산물이 영양으로도 갔음을 알 수 있다.

불영계곡은 봉화에서 갈 때, 울진군 서면 하원리 불영사부터 근남면 행곡리에 이르는 계곡 일대(명승 제6호)를 말한다. 불영사를 중심으로 15㎞의 계곡을 따라 그림 같은 명소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여러 모양의 바위와 낭떠러지가 많아서 특별한 이름을 붙인 장소가 30개나 된다. 광대코바위, 주절이바위, 창옥벽, 명경대, 의상대, 산태극, 수태극 등... 구룡폭포 근처 금강소나무 숲 속에 불영사가 있는데 보기 드문 꼬리진달래와 백리향을 비롯해 560여 종류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조류 11종, 어류 42종, 포유류 17종, 나비 30종, 거미류 94종이 살고 있음이 알려졌다. 불영사 계곡은 장장 15km 에 이르는 길고 장엄한 계곡이다. 예전에는 워낙 교통이 불편한 오지라 찾는 이가 거의 없었으나 1985년 불영사 계곡을 달리는 36번 국도가 포장되면서 여름철 피서지가 되었다. 이곳의 수온은 높아 심장마비 사고가 드물다. 계곡을 따라 가다보면 도로 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이루게 해준다는 사랑바위가 있다. 절벽은 흰빛을 띠는 화강암이 풍화되어 기이한 모습으로, 맑은 물과 어우러 진다. 2층 팔각정인 선유정과 불영정에서 보는 풍경이 아주 좋다. 소박하고 오밀조밀한 경관이 천축산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불영계곡의 중심에 비구니 사찰인 천축산 불영사가 있다.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에 의상대사가 산의 생김이 인도의 천축산과 닮았다고 해서 천축산이라 이름하고 큰 연못에 있는 아홉 마리의 독룡을 주문으로 쫓아낸 후 그 자리에 구룡사(불영사)를 지었다고 한다. 후에 서쪽 산 위에 부처님의 형상을 한 세 개의 바위가 대웅전 앞의 연못에 비친 모습이 관음상처럼 보여서 불영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보통의 절이 산을 등지고 강이나 계곡을 앞에 두고 있는데 불영사는 계곡을 등지고 산을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막상 절 앞에 서면 뒤의 계곡은 보이지 않고 또 하나의 산이 뒤를 받치고 있는 형국이어서 아늑하다. 불영사에는 응진전(보물 제730호), 대웅보전(보물 제1201호), 영산회상도(보물 제1272호),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135호), 부도(경북문화재자료 제162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대웅전 기단 밑에 거북돌을 끼워 건물을 받들게 한 것이 특이하다. 부도 밭 입구에는 의상대사가 불영사 창건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 천연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고사목이 되어 지정이 해제된 밑 둥지만 남아있는 커다란 굴참나무가 있다.

917번 지방도를 따라 가면 88번 국도를 만나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영양으로 가고 동쪽으로 가면 울진의 온정리 백암온천을 거쳐 평해읍으로 간다. 평해읍 남쪽에는 후포항이 있다. 이곳에 난 7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면 울진 비행훈련원을 지나 울진읍에 이른다. 울진읍 남쪽에 36번 국도가 나있어 불영계곡을 거쳐 통고산 자연휴양림을 지나 봉화와 영주로 나갈 수 있다. 봉화의 춘양에서 북쪽으로 길을 잡으면 영월 또는 태백으로 간다. 영월에서는 제천으로 태백에서는 영월 또는 삼척으로 간다. 아래는 죽변항에 쌓인 가자미들과 인근 어촌.

울진읍에서 7번 도로를 타고 계속 북상하면 죽변항에 이른다. 죽변에서 917번 지방도를 타면 무서운 원자력 발전소를 끼고 해발 999미터의 응봉산 기슭에 있는 북면의 덕구 온천으로 간다. 덕구에서는 죽변의 88번이나 울진의 36번 국도같은 게 없다. 그래서 덕구에서 7번 도로를 찾아 타고 북상하여 삼척으로 가본다. 삼척시 원덕읍 호산리에 416번 지방도가 나있는데 이걸 타면 응봉산 북쪽 기슭을 거쳐 가곡면 풍곡리에 이른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동활 계곡을 거쳐 도계읍의 신리에 이르는데 여기서 계속 북쪽으로 가면 근덕면 동해로 나가고 서쪽으로 가면 유명한 통리역을 거쳐 태백시에 이른다. 가곡면 풍곡리에서 남쪽으로 난 910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봉화군 석포면에 이른다. 석포면 소재지에서 31번 도로를 타고 조금만 남쪽으로 가면 국내 최고의 오토 캠핑장인 청옥산 자연휴양림이 있다. 여기서 해발 1,277미터의 청옥산 정상이 가까와 짧은 시간에 등산도 가능하다. 청옥산 자연휴양림은 봉화읍보다 태백시에 더 가깝다. 아름다운 울진에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북면 부구리에 위치한다. 2012년 기준으로 6기의 상업용 원자로가 가동중이며, 발전소 인접부지인 북면 덕천리에 신한울 1,2호기의 공사가 진행 중이다. 7번 국도에서 917번 지방도로 꺾어지는 곳이다. 여기서 덕구 온천이 가깝고 죽변항이 가깝다.

일산에서 통고산까지 여기저기 들러서...

일산에 사는 우리가 통고산 자연휴양림을 거점으로 울진, 봉화, 영양 등을 살펴 볼 경우.... 갈 때 영주와 봉화를 들러 보기로 한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영주IC에서 나와 36국도를 타면 된다. 그러나 좀 밋밋하면 단양을 들러 가기로 한다. 단양IC에서 나와 5번 국도를 타고 도담삼봉을 보고 단양군청 소재지를 거쳐 온달산성으로 간다. 이후 522번 지방도를 타고 영춘면에 가서 935번 지방도를 타고 영월군 김삿갓면의 김삿갓 유적지로 간다. 유적지 구경 후 영월쪽으로 나가 88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가면 우구치 계곡이 나오고 이후 춘양면 소재지 남쪽에서 36번 국도를 타면 된다. 아래는 통고산 정상과 국립통고산자연휴양림 숲속의 집.

 

울진의 죽변항은 대게와 홍게로 유명하다. 사실 대게 생산량의 70%를 울진이 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게 상인들이 교통이 좀 편리한 영덕을 주로 이용하다보니 대게는 영덕이라는 공식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울진 사람들은 울진 대게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덕 앞바다가 대게 서식에 적합하다는 주장이 있지만 울진 사람들은 거기가 거기라고 말한다. 아무튼 소비자 입장에서는 울진에서도 대게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좋다. 북쪽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게 좀 거름찍 하긴 하다.

영양탐방

경북 동북에 있는 영양은 오지로 꼽힌다. 군 면적의 80%가 산림이다. 낙동정맥을 비롯해 크고 작은 산줄기와 봉우리들이 오랜 세월 외부와의 접촉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양은 다른 지자체에 비해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산에 금강송이 빼곡히 우거져 있고, 개울은 바닥이 비칠 만큼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그 위로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며, 옛 모습을 간직한 고택(古宅)이 곳곳에 있다. 그래서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여러 명 태어날 수 있었으리라... 영양에서 돌아 볼 것들은 수하의 산촌생태마을, 반딧불이의 명소인 영양자연생태공원, 본신리 금강송, 산나물과 출맞이 명산인 일월산, 아름다운 숲 외씨버선길, 조지훈 생가이자 숲이 아름다운 주실마을이다.

영양은 수비면 수하계곡 일원을 반딧불이 생태체험마을 특구로 지정, 청소년수련원과 생태학교, 생태공원, 천문대 등을 조성해 놓고 도시인들에게 대자연의 신비를 엿볼 기회를 제공 해 주고 있다. 일월산 남쪽 주실마을(일월면 주곡리)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와 문학관과 시비공원 외에 옥천종택 등 고택(古宅)을 볼 수 있고, 남쪽 석보면소재지의 두들마을에서는 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이문열의 문학연구소와 석계고택, 전통한옥체험관이 있다. 영양향교(일월면), 서석지(청기면), 남자현지사생가(석보면), 봉감모전5층석탑(국보 제187호, 입암면)도 역사적인 유적지들이다. 주실마을에서는 매년 5월 중순 일월산 산나물축제와 같은 시기에 이틀간 지훈예술제가 열리고 있다. 입암면 신구리 선바위 관광지 또한 볼거리다. 이곳에는 영양 고추홍보전시관, 수석분재야생화전시관, 우리 고유 민물고기들이 동굴 속에 전시된 동굴형민물고기전시관이 있다. 관람 무료. 문의 054-682-6271.

첫날 오후 수하산촌생태마을이나 자연생태공원관리사업소 내 펜션 혹은 검마산자연휴양림에 짐을 풀고, 자연생태공원 내 반딧불이 체험과 본신리 금강송 산책을 즐기도록 한다. 이튿날에는 산나물의 보고인 일월산 등산로나 제10회 아름다운 숲길에서 ‘어울림상’을 수상한 외씨버선 걷기 길을 따르며 일월산의 자연을 탐승한 다음 조지훈 문학관이 있는 주실마을이나 이문열 생가가 있는 두들마을을 들르도록 한다. 귀가 길을 안동 방향으로 잡는다면 선바위 관광지를  들러 본다.

수비면 수하리는 성공적인 산촌생태마을이자 관광 거점마을이다. 영양군내에서 유일하게 산림청 지정 우수마을로 선정된 수하산촌생태마을은 무엇보다 호젓한 숙소가 좋다. 도로변 소나무 그늘 아래 지어진 생태마을(펜션)에는 6평형 원룸, 8평형 통나무집, 12평형 통나무집, 20평형 산촌휴양관(세미나실) 등이 들어서 있다. 소나무 그늘 아래 야영데크와 식탁을 갖춰 편리하고, 또한 마을 뒤편 목골 계곡을 막아 어린이용 물놀이터도 만들어놓았다. 산악자전거도 무료로 대여해 뒷산 비포장 산림도로에서 산책이나 자전거 타기도 즐길 수 있다. 관리인 장인순 씨는 “장수포천이라고도 불리는 수하계곡 초입에 위치한 산촌생태마을은 피서철뿐만 아니라 봄가을에도 주말에는 예약하기 어려울 만큼 인기가 있다”며 “수익은 주민들에게 균등하게 배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용료는 1평당 1만 원. 주소 영양군 수비면 수하1리 705-1 수하산촌생태마을(펜션) 문의 010-4073-7178. 네이버 ‘수하산촌생태마을’, 영양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사무실 (054)683-0312

울진 왕피천의 상류를 이루는 수하계곡은 특히 반딧불이생태공원으로 유명하다. 청정한 자연 속에서 청소년들이 호연지기를 키우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이 곳은 청소년수련관과 반딧불이생태학교, 천문대로 구성돼 있다. 생태공원은 여름밤 반딧불이 향연 속에서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을 수 있고, 반딧불이 천문대에서는 별들의 향연 속에서 우주와의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문화 탐방, 원시림 속에서 펼쳐지는 서바이벌 게임도 즐길 수 있다. 생태공원 들머리에 위치한 생태숲은 금강송 기운을 받으면서 산책과 명상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하늘정원, 벤치, 흔들의자 등의 시설이 갖춰 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연상케 하는 반딧불이 관찰은 5월 20일~6월20일(반딧불이), 8월 20일~9월 10일(늦반딧불이) 두 차례에 가능하다. 입장료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 야간 천체관측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1박 2일 천문캠프(4인 이상) 1만 원(숙박, 식사 제외). 자연생태공원관리사업소에서는 펜션도 운영한다. 주소 경북 영양군 수비면 수하리 240, 문의 숙박 054-683-8987~8, 생태학교·천문대 054-683-8685 (http://tour.yyg.go.kr)

영양의 본신리 금강송... ‘나를 안아주세요’, ‘나의 키는 25m이고 가슴높이 지름은 56cm입니다’, ‘붉은 저의 속살 예쁘죠. 옛날 금강산에 많이 자라 금강송이란 이름을 얻은 이 소나무의 특징은, 나무가 곧게 자라고 위쪽은 작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껍질은 얇고 붉은색이며 오래되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다. 또한 나무속은 붉은색이거나 황색을 띠고 있으며 나이테는 가지런하면서도 촘촘하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금강송은 재질이 뛰어나 예로부터 궁궐을 지을 때 사용되거나 또는 왕실의 장례용 관을 짜는 데 사용되었고, 왕실에서는 나무가 함부로 베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황장봉산(黃腸封山)’이라 지정해 놓았다. 영양군은 산야든 물가든 어디를 가나 멋스런 소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수비면 본신리 금강송 생태경영림은 남한 땅에서 몇 안 되는 금강송 군락지다. 남부지방산림청 영덕국유림관리소는 본신리 일원과 함께 신원리 울연산(938.6m), 금장산(849m) 그리고 낙동정맥 검마산(1,017m) 일원 3,461ha를 금강송 보호지역으로 지정해 관리해 오다 2007년 7월 19일부터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특히 본신리 금강송 생태경영림에는 6가닥의 생태탐방코스를 닦아 놓고 민물고기 서식을 위한 댐을 쌓아 놓는가 하면 개울을 가로질러 현수교를 설치해 놓아 탐방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숲해설사들은 제4코스(1km/1시간)와 제5코스(1.2km/1시간30분)를 추천코스로 권하고 있다. 제4코스는 산림수련관 옆 공터에서 옥빛 계류를 건너 거대한 사암 위에 숲을 이룬 금강송을 탐승하는 코스이며, 제5코스는 관리사 뒤편 능선을 거니는 코스로서 20여m 높이로 쭉쭉 뻗어 오른 금강송이 다양한 식생과 함께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데다 조망 또한 뛰어나다. 이용료 무료. 숲해설을 원할 시에는 남부지방산림청 영덕국유림관리소(054-730-8140) 문의. 수비면소재지에서 88번국도를 따라 울진 쪽으로 향하다 보면 검마산자연휴양림 입구(약 1.7km)가 나오고, 여기서 3.5km 더 진행하면 도로 오른쪽으로 금강송 생태경영림 관리소가 보인다. 동해안에서 접근할 경우 7번국도 상 울진군 평해면소재지에서 88번국도를 타고 백암온천과 구수령을 넘도록 한다.

경북 최고봉 일월산(日月山·1,219m)은 이름대로 해와 달이 떠오르는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수평을 이룬 정상능선 양쪽에 봉긋 튀어 오른 일자봉(日字峰·1,219m)과 월자봉(月字峰·1,205m)은 일출과 월출을 맞이하기에 좋다. 영양군은 이런 지리적 특성을 살려 일자봉 정상 부근에 해맞이 광장을 조성하고, 매년 1월 1일 일출시각에 맞춰 해맞이 행사를 열고 있다. 일월산은 ‘접신(接神)의 산’으로 유명하다. 남한 땅에서 신을 만날 수 있는 산은 지리산, 계룡산, 일월산 세 산에 불과하며, 그중 일월산이 가장 영험한 산이라는 게 무속인들의 주장이다. 용화리 선녀골계곡뿐만 아니라 월자봉 아래 황씨부인당과 같은 곳에 이러한 무속인들이 내림굿을 하기 위해 찾아들고 있다.

일월산은 산나물로의 보고이기도 하다. 영양군은 2005년부터 매년 5월 초 일월산과 영양읍내 황용천 복개지 및 영양시장 일원에서 영양산나물축제를 열고 있다. 일월산 일원에서는 등산대회와 산나물 채취 및 체험 행사가 열린다. 주행사장은 일자봉 전망대 일원으로 1일 200명에 한해 예약을 받는다. 일정액의 참가비를 내면 영양군에서 그에 해당하는 상품권을 제공하며, 상품권으로는 영양군내의 식당이나 상가에서 사용할 수 있다. 황용천 복개지에서는 산나물 깜짝 경매와 1,219인분 산나물 비빔밥 만들기, 풍물경연대회·세계 나물음식 페스티벌 등의 행사가 열리며, 영양웰빙관·반딧불이 홍보관·농촌전통테마마을·야생화 및 일월산 산나물 50선 등이 전시된다. 1219인분은 일월산 높이를 상징하는 것이다. 문의 영양군청 산림축산과 054-680-6313. 일월산 산나물 축제의 주행사장은 일자봉 해맞이광장 일원. 행사장 접근로는 다양하다. 영양터널 북단에서 월자봉 부근 KBS중계소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올라선 다음 산허리길을 따라 쿵쿵목이(해발 1,120m, 윗노루목이 2.8km·방아목 3.4km)를 거쳐 일자봉 해맞이광장에 접근하는 길로 40분 정도 걸린다. 등산객들은 윗대티 기점 코스를 가장 선호한다. 윗대티 주차장에서 숲 우거진 능선을 따라 50분 정도 오르면 첫 번째 갈림목에 닿고(해발 1,160m), 여기서 가파른 산길을 40~50분 걸으면 해맞이광장에 올라선다. 해맞이광장에서 월자봉 표지석까지는 쿵쿵목이 길이나 북사면 허리길 중 어느 길을 따라도 된다. 이후 표석 앞 갈림목에서 북동쪽 능선을 따르다 계곡 길로 접어들면 윗대티 주차장에 내려선다. 윗대티 주차장 기점 원점회귀 산행에는 4~5시간 소요.

일월산 허리를 가로지른 ‘외씨버선길’ 영양 1차 구간(8.3km) 또한 인기 있는 걷기 길이다. 이 길은 일제 때 일월산 주변에서 캔 광물과 벌채한 나무들을 실어 나르는 산림도로에서 영양과 봉화를 잇는 국도로 변신했다가 1991년 새 국도가 개통되면서 20년간 내버려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길은 숲이 우거지면서 또 한 번 변신에 성공해 2009년 생명의 숲이 선정하는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뽑혔다. 외씨버선길 영양 1차 구간 들머리는 31번국도 변의 일월자생화공원. 해안절벽 포진지를 떠올리는 자생화공원은 1939년 일제가 광물 수탈을 위해 만든 선광장으로, 1976년 폐광 이후 중금속에 오염된 불모지로 버려져 있다가 2001년 오염된 땅을 밀봉·매립하고 일월산에서 자라는 꽃으로 조성한 자생화공원이다. 일제 수탈의 현장인 이곳은 2006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외씨버선길은 자생화공원 건너편 반변천 물줄기를 따라 윗대티마을로 이어진다. 대티란 영양과 봉화를 잇는 큰 고개란 뜻으로, 대티골은 무속인들의 메카이기도 하다. 골짜기 들머리에는 ‘황씨부인당 상당’ 등 ‘굿당’ 간판이 여럿 서 있고 곳곳에는 치성 흔적이 즐비하다. 옛 31번국도는 윗대티 들머리 갈림목에서 시작된다. 1991년 새 국도 터널이 생길 때까지 버스가 다녔다고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싶을 만큼 좁고 굽이진 옛 31번국도는 숲이 우거져 이젠 걷기에 그만인 산길로 변해 있다. ‘영양 28km’ 글씨가 지워져 가는 낡고 녹슨 이정표 하나만이 이 길이 차량이 오가던 옛 국도였음을 알려준다. 나무의자 쉼터가 있는 ‘진등’에는 빨강·연녹색의 우체통 2개가 서 있다(옛 국도길 3.1km·100분, 옛 마을길 0.8km·30분, 칠밭길 1.7km·30분, 댓골길 2.3km·90분). 희망우체통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그리운 이에게, 여기 같이 오고 싶었지만 같이 못 온 이에게,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써봅시다’라고 적힌 글을 보면 그냥 지나치게 되지 않는다. 길을 안내해 준 권명달(영양군청 산림과) 씨는 “특히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연녹색 우체통에 넣으면 주민들이 수거해 1년 뒤에 부쳐준다”며 “그때 받는 편지는 일월산 정기가 듬뿍 담겨 있을 것”이라 말한다.

옛날 온통 칡밭이었다는 칠밭목(칡밭목) 삼거리를 지나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소천면 경계를 알리는 옛 국도 푯말을 만나고, 이어서 토종벌 보호지역 안내판이 서있는 삼거리 갈림목에 닿는다. 왼쪽은 일월산 정상, 오른쪽은 우련전마을 가는 길로, 오른쪽 콘크리트길을 따르면 영양터널 입구의 우련전마을에 닿는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나온 이름인 우련전(雨蓮田)은 조선 말 신유박해를 피해 들어온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된 순교지이기도 하다. 외씨버선 영양 제1구간은 ‘송이 산지’이기도 하다. 때문에 가을 입산은 제한된다. 약 3시간 소요.

일월면소재지 삼거리에서 918번도로를 따라 약 3.5km 북진하면 도로 오른쪽으로 고풍스런 분위기의 고택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곡리 주실마을이다. ‘승무(僧舞)’의 청록파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조지훈(1920~1968)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경북도 기념물 제78호)과 어린 시절 공부하던 월록서당 등 고택들은 고풍스런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고, ‘지훈문학관’과 ‘지훈 시공원’은 선생의 시 향기와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입구의 주실숲은 아름답다. 느티나무·참느릅나무·시무나무 등이 우거진 이 숲은 2008년 ‘전국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바 있다. 도로 양쪽에 우거진 숲속에는 조지훈과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의 맏형 조동진(1917~1937) 시인의 시비가 서 있다. 조지훈 선생 시비 앞에 조성된 무대에서는 문학해설이나 백일장 등이 열리기도 한다.

영양은 한우고기를 자랑하는 고을이다. 청정지역에서 길러낸 쇠고기는 육질이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한 맛을 낸다. 계절에 따라 밑반찬을 달리하는데 봄철에는 산나물이 나와 한층 맛을 더하며, 업소에 따라 등심·갈빗살을 200g당 2만원 안팎 받는다. 읍내의 고은한정식집은 경기도식 한정식에 경북 오지의 산채를 함께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이다. 인공조미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점심백반 다슬기탕·비빔밥 1만 원, 유유자적(1인분 2만원), 안빈낙도(1인분 3만 원), 무릉도원(이하 한 상·3인 기준 7만 원), 고은수라(10만원), 대비마마수라(15만 원). 영양 토속주인 초화주(1병 2만 원)는 뒤끝이 깨끗한 곡주로 마셔볼 만하다. 문의 683-5005. 서계고택과 석천서당, 궁중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장씨유적비 그리고 이문열문학관이 위치한 석포면 두들마을 한옥체험관의 음식디미방도 찾아볼 만하다. 400년 전 한정식을 내놓는다. 체험 프로그램(10인 이상)은 음식당 1만 원, 취식체험은 소부상 3만 원(7종류), 정부인상 5만 원(11종류). 문의 682-7764.

영덕 평해에서 88번 국도를 타면 백암 온천을 지나 영양군 본산리부터 신원리까지의 금강송 군락지를 볼 수 있음. 이때는 검마산자연휴양림에서 일박하면 좋겠다. 수비에서 북쪽으로 917번 도로를 타면 수하리에 있는 반딧불이생태공원으로 감. 여기서 일월로 나와 918번 도로를 타면 청량산으로 감. 청량산을 넘으면 안동. 봉화와 영양에 있는 주요 음식점들 메뉴가 전부 산채백반에 한우숯불구이. 봉화 춘양에는 송이요리 잘 하는 식당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 지역의 보통 사람들은 거의 풀만 뜯어 먹고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숯불에 구운 한우 고기나 송이 요리를 서민들이 먹었겠어? 이 지역에는 웬 임금님 진상물이 이리 많아? 이후 봉화로 나가 분천, 소천, 춘양, 봉화, 영주로 감. 중앙고속도로 타게...

 영양 수비계곡


 

안동 탐방

 

안동은 조만간 경상북도 도청 소재지가 된다. 지금 도청 소재지가 될 신도시 건설을 위한 터닦이가 한창이란 거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안동이 아니다. 안동시 풍천면 뿐만 아니라 예천군 호명면도 이 신도시에 들기 때문이다. 6:4의 비율이다. 그리고 도청은 안동 시청에서 21.5킬로미터, 예천 군청에서 10.2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다. 예천에 치우친다. 그래서 안동시 상인들은 안동 상권이 그리로 옮겨 갈까봐 걱정을 하고 있다.

안동! 하면 내게는 가장 먼저 기차가 떠오른다. 서울역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한 중앙선 열차는 오후 4시 10분쯤 운산역에 도착했다. 그래서 운산에서는 이 열차를 네시차라고 했다. 이 열차는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모든 역에 다 정차했다. 당시 급행 열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울역에서 운산역까지는 장장 9시간 기차를 타야 했다. 나는 용산역에서 탔다. 부산역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한 열차는 정오쯤 운산역을 지났다. 그래서 이 열차를 운산 사람들은 열두시차라고 했다. 가끔 이 열차를 타고 서울에 오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 문제는 자리였다. 한참 서서 가다가 영주나 제천쯤에서 사람이 내리면 겨우 자리를 잡곤 했다. 3명이 앉아 있는 자리의 손잡이에 엉덩이를 붙이곤 했지... 서울에 도착하면 오후 9시 경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갈 때 주로 아침 7시 30분에 운산역에 도착하는 통근차를 타고 안동역까지 가서 거기서 대기하고 있던 서울행 열차를 탔다. 통근차는 대구에서 오는 것인데 지금 기억으로 증기기관차가 상당히 오랜 동안 사용되었던 것으로... 안동발 서울행 열차는 오전 8시 30분에 출발하여 오후 5시 30분쯤 서울역에 도착했다. 물론 청량리부터는 한강변을 주욱 돌았다는 것. 이 열차의 가장 좋은 점은 안동역이 시발이라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는....

서울역을 출발해 청량리, 양평, 원주, 제천, 영주, 안동, 의성, 영천, 경주, 울산, 기장, 부산으로 가는 중앙선 열차는 하루 한번만 있었다. 물론 그 역방향으로 가는 열차도 하루 한번이었다. 이 두 열차는 대개 영주에서 만났다. 영주에서는 이 차를 두시차라 한다 했다. 열두시차, 두시차, 네시차... 이것들이 제 시간에 도착을 하지 않으면 사고가 난 거다. 한번은 네시차가 여섯 시에 오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죽령에서 열차 사고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아무튼 이 중앙선 열차를 좀 편하게 타고 가는 방법은 기관차 바로 뒤에 있는 2등칸을 타는 것이었다. 물론 한번도 타본 적이 없다. 입구에서 차장이 검표를 했으므로... 2등칸은 서서 가는 게 용납이 되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하얀 천을 덮어 씌워서 깨끗해 보였다. 2등칸을 타면 요즘 비행기 비즈니스석에 탄 것처럼 자랑을 해댔다.

대학생 시절인가? 안동 9시간이 지겨워서 청량리에서 오전 8시에 출발하는 영동선 급행을 탔다. 그랬더니 영주에 오전 10시 30분에 도착하는 거다. 도착해 보니 안동으로 가는 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걸 타고 정오에 안동 도착. 꿈(?) 같았다. 안동에서 친구 만나 점심 먹고 같이 버스 타고 운산에 오니 오후 2시였더라... 오후 4시가 넘자 네시차가 운산 굴에서 튀어 나왔다. 그걸 보면서 저걸 어떻게 타고 다녔지... 하는 생각이... 그러나 요즘은 서울에서 3시간 만에 운산에 도착할 수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거나 중앙고속도로를 타거나... 둘 다 그렇다. 어쨌든 그 대학생 시절에... 정오에 안동을 출발해 대구로 가는 동차를 탔다. 3량으로 기억된다. 1시간 반만에 동대구 도착. 여기서 맹호호 특급을 타다. 시속 90킬로미터로 달려 5시간만에 서울역에 도착하더라...

중앙선 운산역

 

중앙선 안동역

학령 전에는 주로 운산 외가에서 살았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방학만 되면 그 다음 날 운산에 갔다가 개학 전날 서울에 왔다. 그 시간 나는 거랑에도 가고 산에도 올라 가고 청산 방구에도 가고... 메뚜기도 잡고 수영도 하고 전쟁 놀이도 하고 만화도 그리고 잡지도 만들어 보여 주고... 이때 친구들이 박창용, 권중철, 조철수 등이다. 하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놀아서 가끔 외조부모에게 성계가 언제 서울로 가느냐 분주해 죽겠다고 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근에 박창용을 만났는데 쌍용역 역장으로 있었다. 창용이는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그의 어머니를 매우 닮았다. 요즘 제천의 한 교회서 장로로 섬기고 있다니 고맙다.

요즘, 안동이라 하면 찜닭이니 간고등어니 하는데 찜닭은 어릴 적에 들어 본 적이 없다. 간고등어는 장날 장터에서 파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자반 고등어 한 손을 사서 새끼에 묶어 들고 오신 게 기억이 난다. 이걸 장물과 고춧가루와 파를 넣어 찌져 먹거나 숯불에 구워 먹었다. 꼬리꼬리 하고 짰지만 아주 고소했다. 요즘 장인이 만든 간고등어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그 간고등어는 너무 싱겁다. 진짜 간고등어는 그런 맛이 아니다. 운산 옆 동네인 조탑 입구에 그 장인의 간고등어 공장이 있더라. 공장에서 만들어 낸 간고등어가 진짜 간고등어일까? 최근에 내가 운산을 방문했을 때 마침 장날이라 옛 간고등어가 있을까 해서 나가 봤더니 그 넓은 장터에 한 다섯 사람이 앉아 있두만... 오전 11시인데도... 여기서... 왜 운산동을 운산리라 하나? 동은 구의 아랫단위고 리는 면의 아랫단위라고? 운산리... 영 생소하다. 역시 내게는 운산동이다. 조탑동이고, 국곡동이다.

나는 안동에 가도 찜닭이나 간고등어는 안 먹는다. 그대신 안동 국시는 찾아가서 먹는다. 안동 국시는 밀가루에 콩가루를 40%쯤 섞어 반죽을 만든다. 이걸 밀대로 밀어 직경 1미터의 반죽 원을 만들고 이걸 차근차근 접어서 길죽하게 만든 다음 칼로 자근자근 썬다. 그리고 펄펄 끓는 멸치 국물에 면을 넣고 삶는데 정구지와 호박을 채썰어 넣고 다 끓인 후에는 김을 썬 것과 계란 지단을 넣는다. 어릴 때는 이게 무슨 맛인지 몰랐으나 지금은 먹을 때마다 콩가루 맛이 할머니를 그립게 한다. 안동 국시에도 무슨 양반용이 있는지 고깃국물에 고기를 잔뜩 넣는 게 있다는데 고기를 넣으면 맛이야 좋겠지만 서민용은 아닌 것 같다. 일산에서 안동 국시가 한 그릇에 11,000원 하는데... 이해가 안됨. 그래도 사먹음.

안동의 한우 고기는 너무 맛있다. 일산 롯데서 100그램에 15,500원 하는 것도 있더라. 허연 기름이 촘촘히 박혀 있는 걸 뭐 마블링이 예술이라고? 어릴 때 운산에서도 초상이 나면 육개장을 끓여 문상객을 대접했는데 그때 먹은 소고기 맛을 지금도 도무지 잊지를 못한다. 잔치를 하면 돔배기가 올라 오곤 했다. 몇 번 주워 먹은 적이 있는데 요즘 안동에서 파는 헛제사밥에 그 돔베기가 딸려 온다. 그 맛에서 그 옛날 추억이 떠오른다. 그래서 어릴 때는 좋은 추억을 많이 갖도록 부모들이 노력을 해야 한다.이 점에서 나는 외조부모께 감사한다. 설날이면 먹던 안동 식혜도 잊을 수가 없다. 요즘 우리 집에서도 재생을 해봤는데 그 옛날 맛은 아니다. 안동에 가서도 내가 맛봤던 그 안동 식혜를 맛볼 수 없었다. 설날에 맞추어 안동에 가서 헤매고 다녀야 하나? 아울러 땅콩, 들깨, 참깨 강정들도 그때 그 맛을 내는 강정을 아직 만난 적이 없다. 버버리 찰떡은 우리 할머니도 해주신 것 같은데 요즘 이게 안동 명물이라 아주 비싸게 판다니 좀 우습다. 버버리는 벙어리란 의미고 버버리찰떡은 그저 그런 떡이란 말인데... 너무 맛있어서 입이 다물어져 버버리찰떡이라 한다니 해몽이 좋다.

안동에서 필수로 돌아봐야 할 곳들이 있다. 먼저 하회마을이다. 아래 그림은 남쪽에 있는 부용대에서 바라 본 광경이다.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기와집)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내에는 총127가옥이 있으며 43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적 지형(地形):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厓)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山太極 水太極 - 산과 물이 태극 모양」또는「蓮花浮水形-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한다.

세거(世居)한 성씨(姓氏)들: 하회마을의 풍산류씨의 세거 이전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가 먼저 세거하였다고 한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래되고 있으며,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었다는 구전(口傳) 및 강 건너 광덕동의 건짓골에 허정승(許政丞)의 묘가 있어 지금도 해마다 류씨들이 벌초를 하고 있으며, 숭정(崇禎)15년(1642)의 동원록(洞員錄)에는 류씨 이외에도 극히 적은 가구의 허씨와 안씨(安氏)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풍산류씨(豊山柳氏)의 입향(入鄕)에 관한 전설(傳說): 풍산류씨(豊山柳氏)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本鄕)이 풍산(豊山)이지만, 제7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공이 화산에 여러 번(가뭄, 홍수, 평상시)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했다고 한다. 입향에 관하여「나눔」의 전설이 있는데, 집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크게 낭패를 당하던 중 꿈에 신령이 현몽하기를 여기에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활만인(活萬人)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큰 고개 밖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음식과 노자 및 짚신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참외를 심어 인근에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활인(活人)을 하고서야 하회마을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입향 후 풍산류씨들은 계속된 후손들의 중앙관계에의 진출로 점점 성장하였으며,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 등의 조선중기에 배출한 명신들로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하회마을의 전래 놀이: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을 위한 놀이와 선비들을 위한 놀이가 병존하였다.하회별신굿탈놀이 ------ 굿을 겸한 탈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선유줄불놀이 ------ 시회(詩會)를 겸한 선유(船遊) 놀이

안동 시내에서 5번 국도를 따라 영주방면으로 3㎞정도 가면 한티재에 이른다. 이 한티재를 넘어 2㎞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국도변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마애불상을 만나게 된다. 이 불상이 바로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안동이천동석불상이다. 속칭 ‘제비원미륵불’로도 불리는 이 불상 뒤편에 있는 조그만 절이 바로 ‘연미사(燕尾寺)’ 이다. 634년(신라 선덕여왕 3년) 명덕(明德)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명덕은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 중 한 명으로, 바위에 불상을 새겨 모시고 사찰을 세웠다. 그 뒤 불상을 덮은 지붕이 제비와 비슷하여 연자루(燕子樓)라 하였고, 승려가 거주하는 요사채(寮舍)는 제비꼬리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연미사(燕尾舍)라고 이름지었으며, 법당은 제비부리에 해당한다고 하여 연구사(燕口寺)라 불렀다.

고려시대 재난으로 불상머리가 굴러 떨어져 파괴 되자 다시 복원하고 전각 중수와 삼층 석탑을 조성하였는데, 이때부터 산 이름이 오도산(五圖山)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연구사는 폐사되기에 이르고 다만 석불만 남아 있었다. 사찰의 이름 마저도 실전(失傳)되어 ‘연비원불사’로만 전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봉정사의 신도 모임으로 등촉계의 일원인 ‘거사림(居士林)’에서 사찰의 창건을 발의하여, 1934년 연미사 (燕尾舍) 유지(遺址)에 사찰을 새롭게 조성하고 구전(口傳)에 따라 연미사(燕尾寺)로 하였다. 법당인 대웅전은 1978년 증축하였는데 기존의 정면 3칸, 측면 1칸의 대웅전을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증축하였다. 1986년 단청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동이천동석불상’이 위치한 이 지역은 속칭 ‘제비원’으로 불린다. 그런데 이름에서 '원'은 사람들이 여행길에서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을 뜻한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지방으로 출장 가는 관리들의 숙소로 쓰기 위하여 교통 요지에 있는 사찰을 국가적인 차원의 숙소인 ‘원(院)’으로 지정하여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영남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또 서울로 갈 때에는 반드시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있던 것이 바로 연비원 (燕飛院)이었다. 따라서 연미사(燕尾寺)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전설의 배경이었던 ‘연(燕)’, 즉 ‘제비’에 국가지정 숙박시설인 원(院)이 결합 되어 ‘제비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제비가 날아가는 쪽의 형세라고 해서 ‘연비원’ 또는 ‘연미원’ 이라고 하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석불상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명칭으로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특히 제비원은 성주풀이에서 ‘성주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 일러라’라는 사설에 나오듯이 우리나라 성주민속신앙의 정신적인 근원지로서 자리매김되어 있는 뜻깊은 장소이다.

안동댐 근처 낙동강에 놓여 있는 월영교는 2003년 개통되었으며 길이 387m, 너비 3.6m로 국내최장 목책 인도교이다. 다리 한가운데에는 월영정(月映亭)이 있다. 월영교란 명칭은 시민의 의견을 모아 댐 건설로 수몰된 월영대가 이곳으로 온 인연과 월곡면, 음달골이라는 지명을 참고로 하여 확정되었다. 낙동강을 감싸듯 하는 산세와 댐으로 이루어진 울타리 같은 지형은 밤하늘에 뜬 달을 마음속에 파고들게 한다. 천공으로부터 내려온 달을 강물에 띄운 채 가슴에 파고든 아린 달빛은 잊힌 꿈을 일깨우고 다시 호수의 달빛이 되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으려 한다. 월영교는 이런 자연풍광을 드러내는 조형물이지만, 그보다 이 지역에 살았던 이응태부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오래도록 기념하고자 했다고 한다. 먼저 간 남편을 위해 아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한 켤레 미투리 모양을 이 다리 모습에 담았다는 것이다.

이응태 부부의 사연은 1998년 5월 안동시 정상동 택지개발 때 이용태(1556~1586)의 무덤을 이장하다가 발견된 미투리, 의복, 형의 만시(輓時)등 유물과 함께 출토돼 450년만에 세상에 공개됐고, 현재 안동대 박물관에서 보관.전시하고 있다. 부인(원이 엄마)의 편지글은 '원이 엄마의 애절한 글'이란 제목으로 자연석에 새겨 정하동 귀래정 옆 녹지공원에서 제막되어 있다. 고성 이씨 이응태의 부인은 남편의 병환이 중해지자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줄기로 미투리를 삼는 등 정성을 다해 쾌유를 기원했으나 남편이 어린 아들과 유복자를 두고 떠나자 안타까운 마음과 사모하는 정을 가로 58cm, 세로33cm크기의 한지에 한글 고어체로 적어 관속에 넣었다. 이 편지는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보낸 한 여인의 애타는 그리움과 생전에 각별했던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어 이를 보는 현대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은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달려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당신께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 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와 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년)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천이 적시는 의성 동부와 안동 남부

 

의성군은 경북 북부 지역의 중앙에 위치한다. 땅 넓이도 전국의 모든 군들 가운데 가장 넓은 축에 속한다. 북으로 안동시와 문경시에 접하고 서로 상주시에 접하며 남으로 구미시에 접한다. 동으로는 청송군이다. 영주의 내성천처럼 낙동강에 합류하는 의성의 하천이 미천이다. 의성군 옥산면 황학산 일대서 발원하여 정자리에서 달곡천과 합류하고 점곡면 서변리에서 옥곡천과 합류한다. 이후 후평뜰을 지나 세촌에 이르고 굽이굽이를 반복하며 화암철교를 지나 안동 일직 땅에 들어 선다. 이후 운산을 지나 청산 방구를 휘돌아 무릉 암산 유원지를 만들고 이후 안망천에 합류하여 남후 검암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어린 시절 여름에는 멱을 감고 겨울에는 시겟또를 타고 춘추로 꼴부리를 줍던 강이다. 후평뜰, 즉 뒷뜰에서 단촌으로 나올 때 미천은 큰 강으로 여겨졌다. 장수네 과수원에서 마당방구를 바라 볼 때 그 밑을 구비구비 시퍼렇게 흐르던 강물은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상류에 저수지를 많이 만들어 놓아 곳곳에 와디가 보인다.

일직에서 구미로 들어가면 비교적 최근에 닦여 진 79번 국도를 만난다. 팽목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로 간다. 구계리에서 고찰 고운사가 가깝다. 고운사는 그 입구가 압권이다. 소나무로 덮여진 길은 아름답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의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고운사(高雲寺)였으나, 최치원이 머물며 가운루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래 최치원의 호인 고운(孤雲)을 따라 절의 이름을 개칭했다. 신라 말기의 승려로 고려 태조의 스승이었던 도선이 크게 중창하여 사찰의 규모가 커졌다. 약사전 불상과 나한전 앞 삼층석탑은 도선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한동안 사찰의 자세한 연혁이 전해지지 않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였던 만큼 경북 지역을 대표하는 대형 사찰 중 하나였다. 조계종도 제16교구의 본사로 편성해 경북 지역의 말사를 관할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제 패망 이후 크게 쇠락하여 본사로는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입구에는 소나무 숲길이 있다. 고운사는 지장보살 영험성지라 하여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렸다. 이때문에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묻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운사에는 지장보살 탱화가 있고 명부전에 염라10왕이 봉안되어 있다.

고운사에서 후평으로 나가 단촌으로 나오면 중앙선과 5번 국도를 만난다. 그러나 중앙선의 단촌역은 2008년 12월 1일부로 폐쇄되었다. 단촌역은 서쪽으로 장림으로 가고 동쪽으로 후평으로 가는 중요한 역이었다. 역 주변에는 장터가 있어 큰 오일장이 섰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러니 역이 폐쇄되었겠지. 역이 폐쇄되었다는 것은 단촌의 인구가 줄었다는 말이렷다! 하기야 내가 아는 사람들도 대구나 군위로 나가서 살고 있다고 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단촌역에서 내려 (단 한 정거정) 장림으로 가던 추억이 소롯이 남아 있다. 높은 산을 넘어야 했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오갔기 때문에 길은 반질반질 했다. 장림에서 산을 넘기가 부담스러우면 세촌으로 돌아 나왔다. 거기에도 조그만 천이 흐르고 있어 몇 번이나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세촌에서 단촌역이 가까웠다.

다시 후평으로 돌아와서... 뒷뜰이라고도 하는 후평은 의성 산골에서는 보기 드믄 너른 들판이었다. 여기에 미천이 흐른다. 미천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바로 79번 국도를 타야 한다. 이 국도를 언필칭 일직점곡로라 한다. 안동시 일직면에서 의성군 점곡면으로 가는 길이란 뜻이다. 이 길은 청송으로 뻗어 있다. 위 사진은 점곡면 들판. 단촌에서 남쪽으로 한 정거장만 가면 의성군청이 있는 의성읍이다. 의성읍에 대한 기억은 장날 쇠전과 가까이서 벌어진 씨름대회가 고작이다.

무릉 암산

나는 학령 전 기간을 외가에서 보냈다. 외가는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운산동에 있었다. 이 동네 변두리로 국철인 중앙선이 달리고 있었고 기차가 서는 운산역이 있었다. 나의 친가가 있는 용산역에서 오전 7시 10분에 중앙선 열차를 타면 그 열차는 운산역에 오후 4시경에 도착했다. 자그마치 9시간을 달렸던 것이다. 그래서 운산에 살던 사람들은 이 열차를 네 시차라고 불렀다. 나의 기억 속에 운산은 매우 먼 곳이었다. 운산에서는 서울이 멀고 먼 곳으로 여겨졌다.

운산은 시골이었지만 그래도 그 지역에서는 중심지였다. 운산은 장림 출신의 외할아버지 신윤경 씨와 국곡 출신의 외할머니 전학녀 씨가 결혼하여 정착한 마을이다. 신윤경 씨는 대목이라 경상도 지역은 물론 만주 지역까지 가서 일을 하곤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견문을 쌓은 분이었다. 그래서 교통이 비교적 편한 운산에 신접살림을 차렸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처음 정착한 곳은 구터였다 한다. 운산에 기차용 터널이 하나 있는데, 이 터널을 안동 방향으로 나가면 왼쪽에 자리한 곳이 구터다. 외가가 이곳에 있을 때 여우들이 많이 서식했다고 한다.

서울서 기차만 보면 생각났던 외가 옆 굴... 우물은 없어지고 각종 기계들만...

운산의 외가에는 장날이 되면 사방에서 친척들이 몰려 들었다. 뒷뜰이라던 후평에서 오신 외할아버지의 친동생... 나는 작은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국곡에서 오신 외할머니의 큰오라버니, 장림에서 오신 외할아버지의 여동생... 나는 고모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어담에서 오신 분도 있었다. 그리고 이 분들의 배우자들과 자녀들...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분들도 참 많았다. 많은 분들이 장날을 맞아 집에 찾아 오면 외할머니는 콩가루를 섞어서 만든 칼국수를 만들어 점심 대접을 하시곤 했다. 그리고 파장할 때쯤 장에 가서 소금에 저린 고등어 두 마리와 큰 정종 병에 담은 등유를 사오셨다. 이 고등어가 진정한 안동 간고등어라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정종 병에 담긴 등유를 ‘지름’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름은 호롱불을 켜는데 사용하였다. 이 당시 호야 또는 남포불이라던 램프등은 교회에서와 부자들이 사용했다.

아, 마음이 짠하다. 저기서 버선 발로 뛰어 나오시던 전학녀 할머니...

 

창룡네 집, 장수네 집, 철수네 집... 다 없어 졌다.

 

운산교회 옛 예배당. 십자가는 좀 그대로 두지... 외할아버지 신윤경 집사가 지으셨다!

 

이게 장날 장터 모습!

 

5번 국도 운산 구간. 오른쪽 청산 방구 가는 곳이 초라하다.

운산에는 예배당이 하나 있다. 나는 외할아버지 또는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 새벽마다 거기에 가서 기도회에 참석했다. 외할머니는 18년 동안 거의 매일 새벽 3시 반이면 일어나셔서 옷을 든든히 입고 자부동이라던 방석에 성경책과 찬송책을 넣어 예배당으로 가셨다. 그리고 새벽 4시에 초종을 치고 새벽 4시 30분에 재종을 쳤다. 할아버지는 초종이 울리면 나를 업고 예배당으로 가셨고, 재종이 울리면 조사님이 나와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조사님의 설교가 끝나면 찬송을 부르고 주기도문으로 기도회를 마치는데, 기도회를 마친 후에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하고 거기서 나오셨다. 이후 할머니는 아침 식사를 마련하셨다. 밥은 가마솥에 지으셨는데 연료는 대개 할아버지가 산에서 긁어오신 검불이었다. 장작은 엄청나게 쌓아 놓고도 사용하지를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이런저런 농사 준비를 하셨다.

국곡교회 예배당이 허물어 지고 그 자리에 구원파 건물이 들어 섰다.

기회가 되면 나는 외가의 친지들과 함께 국곡, 뒷뜰, 장림에 가기도 했다. 몇 일 그곳에 머물다 운산 외가에 돌아오곤 했는데, 오가는 길이 매우 멀게 여겨졌다. 좁은 신작로를 따라 한없이 걷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산 길을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단촌, 의성읍, 안동읍, 암산, 용각, 풍천 등을 들리거나 이야기를 들었다. 국곡은 위쪽으로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게다가 마을 한복판으로 도로가 났다. 그 옛날 포근하고 호젓했던 분위기는 간데 온데 없다. 게다가 집들이 많았던 남쪽 사면은 골프장이 들어 섰다. 물론 집들이 헐렸고 거기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마을 자체가 없어진 것 같다.

국곡교회 이야기

국화가 많이 피는 계곡에 있는 마을이라서 국곡입니다. 국곡도 상 국곡과 하 국곡이 있습니다. 상 국곡이란 지대가 높은 국곡이란 의미겠지요. 하지만 계곡이 높아봤자 얼마나 높겠습니까? 교회는 하 국곡에 있었습니다. 하 국곡에서 조탑이 가깝습니다. 그리고 조탑에서 운산이 가깝지요. 나의 외가는 운산에 있었습니다. 외가에서 자라게 된 나는 새벽마다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 등에 업혀 새벽기도를 나갔습니다. 새벽잠을 깨야하는... 그리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차가운 새벽공기를 맞으며... 걸어서 10분쯤 걸리는 운산교회까지 가는 새벽마다의 여정은 내게 즐거운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가끔은 할머니가, 또는 할아버지가, 또는 두 분이 함께 나를 데리고 멀리 갔습니다. 그 분들은 나를 업고 다녔지만 힘들면 내려 놓고 걸어가라고 했지요. 그렇게 해서 간 곳이 바로 국곡 즉 하 국곡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그곳 할아버지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 곳 할아버지란 할머니의 첫째 오빠가 되는 분이지요. 그리고 항상 저녁에는 그곳 예배당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게 바로 국곡교회의 부흥회였습니다. 말하자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운산에 살다가 국곡에서 부흥회가 있다고 하면 열 일 제치고 참석하곤 했는데 내가 딸려 있으니까 나까지 데리고 갔다는 말이 됩니다. 그때부터 부흥회는 새벽기도와 함께 내게 진절머리를 내는 일이 되었습니다. 아주 그냥 주욱... 평생을... 

그렇다면 어떻게 산골에 있는 국곡이 안동에서는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 들인 마을이 되었을까? 사실 안동 시내에 있는 유명한 안동교회도 역사가 국곡교회보다 짧습니다. 그런데... 짧다고 말하면 어패가 있습니다. 국곡교회는 이미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늦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국곡교회가 안동지방 최초의 교회가 된 것은 한 사람의 개심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권수백(權秀伯) 조사입니다. 다음은 권수백의 손자인 권중원(權重元)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권수백(1871-1941)은 경북 안동군 일직면 국곡동에서 태어났습니다. 호가 직곡(直谷)인데 누가봐도 일직면의 직과 국곡동의 곡을 따온 것으로 애향심이 높은 사람같습니다. 그는 1898년 일직의 돌고개에서 안의와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가족과 문중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지만 권서인으로 살았습니다. 1902년 3월에 안의와 선교사가 와룡면 지내리 홍재삼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권수백은 이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갔습니다. 그 해 김병석, 김병일 등과 협력하여 국곡교회(菊谷敎會)를 설립했습니다. 나의 노할머니가 국곡에서 자녀들을 생산할 때입니다. 국곡교회의 설립은 다른 마을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풍산, 괴산, 창길, 동산, 하령, 걸촌, 장사리, 소호리, 중산, 아곡, 임동, 마령 등에 교회가 개척되었다고 합니다. 

권수백은 1913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았으나 1919년 5학년 졸업을 앞두고 3.1운동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그는 12년 전 자신이 개척한 안평면의 괴산교회 김원휘(金原輝) 조사, 쌍계교회 박영화(朴永和) 목사와 접촉하여 의성지역 3․1운동을 전개하기로 했고 또 안동읍 3.1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결국  3월 18일 안동 삼산동 만세운동으로 안동경찰서에 구금되어 전기 고문을 받다가 양손 무명지가 꼬부라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손가락 꼬부라진 조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1923년 국곡교회의 장로가 된 그는 노회에 출입했고 1924년에는 총회 총대로 파송되었습니다. 권수백은 한학과 유학을 익혔으나 복음을 받아 들인 후부터는 기독교 신앙과 사상으로 개화되어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도포와 의관을 벗어 버렸으며 전통제례와 족보도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새 노래와 찬송을 보급하고 남녀칠세부동석도 혁파하여 예배시간에 남녀를 구분하는 휘장까지 없앴다고 하니다. 교인 모두 성경 찬송을 볼 수 있도록 한글을 가르쳤고 금주 금연운동을 장려했으며 회의법을 가르쳐 교회운영을 민주화했다고 합니다. 서구식 운동을 도입하여 새끼줄로 역어 만든 공으로 축구를 장려 했다고 합니다. 1930년대에 교회 뒷동산을 개간하여 복숭아 등 갖가지 신품종을 심어 농사개량에도 앞장섰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곡은 복받은 마을이 되었고 주일이면 주민 모두가 일손을 놓고 예배드렸으며 동산의 탐스런 복숭아가 떨어져도 주인이 아니면 함부로 줍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정이 교계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권수백은 서당도 없는 지역에 1908년 사랑방 사숙을 개설하여 신교육을 시작했습니다. 1927년에는 2년제의 일국서당을 교회내에 개설하고 학생 20여명을 모집해서 교육을 실시했고, 1930년에는 본교회 당회원인 장사성(張師聖) 목사, 김병석(金炳錫) 장로와 권명윤(權命潤) 영수로 더불어 교회 뒷산을 깎아 270여평의 대지를 마련 8간의 교실을 건축하고 4년제 일국학원을 세웠습니다. 창가 시간에는 찬송가와 민요만 가르치고 일본 국가나 군가는 가르치지 않아 권수백은 호출되었다고 합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권수백은 신사참배는 확실한 우상숭배라 하여 거부했고 이 때문에 그는 탄압을 받았습니다.  1938년 기독교 각 교단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그는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한다면서 일국학원을 폐쇄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가택연금을 당했고 그 상태에서 1941년 8월 소천하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국곡교회 이야기... 권두현 씨가 2002년 11월 22일  ‘안동최초의 교회 국곡교회’란 제목으로 쓴 글입니다. 

안동의 번화가는 안동지역의 갖은 종교문화를 살필 수 있는 곳이다. 시종 절을 하는 신종 탁발승과 “천리교, 천리교”를 외치는 신흥종교인, “하나님을 믿고 천당가세요”하고 권하는 기독교인, 구세군의 종소리, 가스펠 송을 하는 성가대 등 다양한 종교인들의 전도 혹은 포교를 심심찮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안동지역을 표현하는 다양한 말 가운데 ‘민속의 기반위에 고려시대까지 불교가 성했고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성했으며 기독교 전래이후 기독교가 흥기하는 지역’이라는 일단의 견해가 새삼 떠오른다. 

전도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교리 때문인지 이러한 일군의 종교인들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종교인들이 기독교인들 같다. 전도행사를 치루는 횟수도 그렇거니와 전단이나 혹은 복음성가를 전하는 양태가 타 종교에 비하여 짜임새가 있다. 기독교는 해방이후 괄목할만한 교세확장을 이루는데 이러한 적극적인 전도가 그 원인이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억측은 아닐 것이다. 특히 안동은 타 지역에 비하여 더욱 모범적인 기독교세 성장을 가져온 지역이다. 김광현 목사는 ‘안동문화 16집’의 글에서 기독교가 한국사회에서 흥기한 까닭으로 기독교 전래시기, 타종교의 대별성, 기독교문화와 민족문화의 접변성이라는 보편적 이유를 들고 특히 안동지역에서 기독교가 융성하고 있는 이유로 장로교단의 조직성, 선교사의 활동력을 들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김광현 목사의 의견은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 한가지를 보태고 싶다. 그것은 안동에서 숭고한 믿음으로 여호와와 성경 말씀을 몸으로 행한 선배 기독교인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바로 그러한 역사에 대하여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당시의 활동을 잘 알고 있지 못하다. 안동에서 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진 시기는 언제쯤일까? ‘경안노회 70년사’는 안동지역 최초의 교회를 1902년에 세워진 비봉교회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비봉교회의 당회가 1915년에 조직되어 비봉교회가 최초의 교회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고 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국곡교회를 거명하고 있다. 

일직면의 유리 한방 병원을 뒤로 하고 고상동을 거쳐 고개 하나를 넘으면 국곡동에 도착한다. 도착한 국곡동의 첫느낌은 안타까움 바로 그것이었다. 요란한 역사적 현장에 대한 어설픈 기대감을 비웃듯이 필자를 맞이한 것은 인적없는 몇가구의 집들과 이미 붉은색이 완연한 교회종과 종의 무게를 겨우 버티고 있는 초라한 종각이었다. 다른 한쪽에는 포크레인이 볼쌍 사납게 자리잡고 있어 한눈에 교회건물이 철거되었음도 알게 해 주었다. 혹시나(!) 나의 이런 예상이 잘못되기를 바라면서 인근 주민들을 찾았다. 가라앉은 마음 때문일까 햇살이 무겁게 느껴졌으며 집담은 높게만 느껴졌다. 인근 가까운 집 대문을 열고 주인을 불렀다. 그러나 주인대신 나를 맞이하는 것은 젖은 눈망울에 송아지 세 마리였다. 그리고 뒤이어 아저씨 한분이 무슨 일로 이 촌동네를 찾아왔을까하는 의아심 섞인 눈으로 “왜 그러냐”고 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저곳이 국곡교회가 있었던 곳입니까” “교회는 벌써 뜯겼어 한 두어달 되는데…” “아! 예. 저 잠시 제게 시간을 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때 만난 사람이 나이가 예순둘인 국곡마을 토박이였다. 새마을운동 당시 국곡은 모범적인 마을로 표창을 여러번 받았으며 현재의 마을회관도 당시에 지은 건물이라면서 시작된 국곡 이야기는 “근데 인제는 노인들밖에 없어 젊은 사람은 돈벌로 다 떠나고”하는 푸념으로 이어졌다. 

국곡에 처음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한 사람은 권수백 장로라는 점은 마을사람들의 말과 기독교 관련서적 내용이 모두 한결같다. ‘경안노회 70년사’에 권수백 장로와 국곡교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어 이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안의와 목사가 구미시장에서 전도할 때 국곡사람 권수백이 쪽복음을 맏아 읽던 중 감화를 받아 믿기로 작정하고 전리를 더 알기 위해서 선교사의 뒤를 수소문하여 찾아간 곳이 와룡면 지내리였다. 그는 거기서 홍재삼의 집에 유숙하고 있는 선교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다. 권수백은 동민들과 문중의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전도한 결과 믿는 사람들이 불어나게 되어 김병석, 김병일 등의 가정에서 돌아가면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곡교회의 시작이 된 것이다”. 

주민들의 사이에서 권수백 장로는 전설이었다. 국곡교회 건물을 권수백 장로가 손수만든 이야기, 일직에서 일어나 3.1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옥살이를 했던 이야기, 일제의 신사참배 강압을 거부한 이야기, 일본순사들의 감시를 늘 받았으며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행을 선택하였다는 이야기 등 여러모로 보아 권수백 장로는 국곡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음은 주민들과의 대화속에서 전해오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권수백 장로의 신앙심으로 시작된 국곡교회는 김병석, 권화선과 외국인 선교사 권찬영, 옥효열(?), 안목사 등에 의해 발전한다. 현재 79세 되는 김모씨는 하곡, 고일, 일직, 어담, 행계, 아텀실, 용각 등 인근지역의 주민들이 모두 국곡교회로 모였으며 인원은 약 200여명 정도가 되었다고 60년 전 국곡을 회상하였다. 또한 교회를 다니기 위해 국곡으로 혼인을 맺는 경우가 많아 국곡 마을사람들 모두가 기독교도들이었으며 교회 일이 곧 마을일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는 당시 가장 큰 마을행사 크리스마스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여 국곡동민들의 기독적 삶을 짐작하게 하였다. 필자가 ‘풋굿 먹을때 교회에서 먹었느냐’고 묻자 ‘풋굿은 일꾼들의 행사이기 때문에 교회와는 무관한 것’이라 했지만, 마을에 사람이 죽었을 때 부고를 전하는 방법 중 하나가 교회 종을 이용한다고 했다. 주민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보통 예배를 볼 때는 아침나절에 댕그랑 댕그랑 하고 치지만 사람이 죽었을 때는 사종(死鐘)이라 그래가 죽은사람 나이만치 치는데 댕 댕 하고 경건하게 치기 때문에 종소리가 다르다’고 하였다. 한 아주머니는 친정에서 예배드릴때는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 휘장을 치고 서로 보지 못하게 한 채 예배를 보았는데 국곡교회에서는 남자줄 여자줄만 갈랐을 뿐이어서 국곡이 좀더 개방적이었음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교회행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는 역시 크리스마스를 꼽았다. 크리스마스 행사로는 지금과 똑같이 연극, 학예회, 춤 등을 하였다고 하며 입구에는 풍선으로 대문을 만들었고 교회를 중심으로 만국기를 달아 아이들의 무척 좋아하였다고 한다. 

국곡이 기독교인들의 신앙공동체가 되자 자연 이곳을 중심으로 당시로는 선진적이라 할 수 있는 서구문물이 많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당시 국곡 문화적 위상은 ‘국곡서울’이라는 인근 주민들의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70-80년 전에 노란머리 파란눈의 선교사들이 국곡을 자주 드나들었으며 종교적으로도 당시 타지역과 구별되는 기독교인들의 마을이었고 서구의 신기한 문물이 국곡을 통하여 들어오니 국곡을 바라보는 인근마을사람들의 눈은 예사로울수 없었을 것이 점은 쉬 짐작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국곡의 이러한 역사 속에서 배출된 진실힌 기독교인들은 안동을 비롯한 기독교 선교활동에 일선에 서서 개척교회로서 국곡교회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국곡에 아픔이 있었다. 문제의 시작은 1971년 울릉도에서 소천섭 목사가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소천섭 목사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당시 예수교장로회와 상당한 차이를 보여 결국 국곡교회는 예수교장로회에서 탈퇴하여 현재의 ‘기독교복음침례회’로 종파를 바꾸게 되었고 이후 국곡교회는 ‘기독교복음침례회’에 가입된 마을주민들 손에 의하여 관리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최근 교회부지로 도로가 포장되면서 땅의 일부에 대한 보상금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 보상금 문제로 국곡 교회 주민들과 시내 모 기독교 재단과의 법정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종파를 바꾸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였던 마을주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일주일 후 다시 국곡동에 들어가 다른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게 되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교회에 나가는 것을 중지하고 있는 주민이 많다고 하면서 당시의 갈등상황들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처녀시절 독실한 신자였던 이분은 “교회 나갈라고 일로(이리로) 시집 왔는데…”하며 뒷말을 흐리면서 당시 교회가 분열되면서 겪은 심정과 현재 교회를 다니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음성적으로 토로하였다. 어떤 주민은 아예 교회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하면서 역정을 냈다. 한편 현재 국곡동에는 기독교복음침례회 소속 정회원이 16명이며 준회원도 몇 명 두고 있다. 이들은 현재 교회건물이 없어 마을회관에 모여 예배를 보고 있으며 한달에 한 번 정도 목사가 소속 종단에서 파견되며 대부분 예배는 비디오를 이용하거나 기도회를 한다고 한다. 성경 해석의 엇갈린 견해로 종파가 형성되는 예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만난다. 종파 분열은 어쩌면 종교가 가지는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 와중에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상처받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임에 분명하다. 신은 언제나 묵묵히 인간을 지켜보지만 공연한 인간의 부질없는 생각을 신의 이름으로 행하고, 신의 이름을 빌리면 얼마든지 합법성이 부여되는 어리석은 행동 뒤에는 진실한 신앙인의 고통이 있다는 것은 경고되어야 마땅할 것이라고 믿는다. 국곡교회의 갈등도 이러한 점에서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어떤 종파의 해석이 맞고 맞지않고하는 문제가 아니라 “글을 몰래도 국곡예배당에는 착실히 나갔지요” 하는 한 주민의 말처럼 늘 뜨거운 신앙심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가는 소박한 삶이 침해받고 마침내 묻혀야만 하는 그 현실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국곡교회사에서 놓쳐서는 안될 것이 ‘일국학원’ 학원 이야기다. 일국학원이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주민들이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나 마을주민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192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일국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필자가 일국의 한문명칭을 일국(日菊)이 아니냐고 묻자, 국의 한자어는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일자의 한자어는 분명히 일(一)자라고 못받았다. 일국학원이 구체적으로 누구에 의하여 세워졌는지 정확하지 않다. 일부 마을사람들은 권수백 장로가 아닐까하고 추측하기도 하였지만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일국학원의 건립에 국곡교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위치로 보아 일국학원은 현재 국곡교회 부지 바로 위에 있는 교회 사택 자리에 있었고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대부분 일국학원의 학생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10여명의 교사가 수시로 와서 가르쳤는데 이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도 일국학원의 건립과 교육에 국곡교회가 주체였음을 입증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국학원 학생들은 국곡을 중심으로하여 사방 30리 안에서 모두 모여들었다고 한다. 4년제 학교로서 학생들은 30-40여명 정도를 유지하였으며 가르친 과목은 일본국어, 산수, 역사, 미술, 조선어 등이었다. 일국학원은 폐교된 시기는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한 시기라고 주민들은 기억한다. 일본순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점과 함께 또한 인근 일직에 학교가 만들어져 학생들의 대부분이 일직으로 옮겨 학생들 수가 줄어든 원인도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폐교된 후 일국학원학생들은 전부 일직에 있는 학교로 옮겼지만 학교가 멀리 있는 관계로 국곡을 비롯한 고상등지의 학생들은 학교를 포기하는 일이 많았다고 주민들은 술회한다. 권수백 장로는 신사참배을 거부한 관계로 일분 순사에게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고 주민들은 전한다. 그러나 권수백 장로가 국곡을 떠나고 일제의 탄압이 가일층 심해오자 예배를 드리전에 ‘동배유배’를 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예배 전에 동쪽으로 절을 하고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주민들 중에서 아직도 동방유배가 신사참배와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 심사를 묘하게 만들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그것은 가슴아픈 일일에는 분명하다. 

일제의 식민잔재는 종교문화에 의외로 많이 남아있음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문경 김용사를 갔을 때 대웅전 앞에 있는 석등에 ‘소화(昭和) 00년’ 이라는 글씨가 국화무늬와 함께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는 것이나 불교의 발원문에 천왕에 대한 만수무강을 비는 내용이 담긴 것은 한국 산천에 철심이 박힌것과 같은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있음도 물론 당연하다.

현재는 볼 수 없지만 국곡교회에서 혼례를 많이 치루었다는 소리를 듣고 국곡교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한장 구할 수 없느냐고 하자 오래된 사진첩에서 사진 한장을 골라왔다. 코스모스 속에서 4명의 낭자가 있고 그뒤로 보이는 건물이 국곡교회라 하였다. 사진에서 보이는 교회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작은 신앙심이 보이는 것처럼 아늑하고 편안하다. 약 40여평의 규모인데도 오막살이 혹은 다락방처럼 귀엽고 포근한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사진 속의 이 국곡교회는 교회건물로는 세 번째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권수백 장로에 의하여 처음 만들어졌고 이후 1910년경에 두 번째 건물이 들어서고 1930년대 초반에 다시 지금의 집을 지은 것이다. 당시 이 건물을 건립하기 위하여 1000원을 목표로하여 부흥회를 열었는데 부흥회에서 걷힌 돈이 800원이었다고 한다. 나머지 기금은 마을사람들의 품값으로 채울 요랑으로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나무는 모두 춘양에서 마을사람들이 직접 우송하였으며 기타 작은 것들도 모두 마을사람들이 손수 다듬고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공사는 몇 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모두 1200원이 모금되어 공사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은 적립하여 교회의 중요한 대소사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국곡교회 관련 경안노회의 문서 

70년대의 노회 활동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은 아무래도 두 노회가 합병한 것이다. 열세에 놓인 경중노회는 그 동안 교회분열의 가장 큰 상처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국곡교회 관련 대한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 회의록의 일부다. 

1974년 3월(95회)노회시 노회장 조제봉 목사(길안교회)가 소천섭목사에 대한 고소장이 상정되어 소천섭 목사 제명청원서를 본회의에서 처리키로 했다. 소천섭 씨는 구의령 선교사의 지원으로 성장한 자로서 세칭 구원파라 하는 단체에 속해 비성서적 교리를 가르치므로 말썽이 되자 노회에서 제명하게 되니 국곡교회조차 잃어 버리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이에 따른 국굑교회 수습의 건이 상정되자 임원회에 일임하여 수습위원으로 윤달부 목사 김상한 목사 정복득 장로로 정하고 일체를 일임했다.

수습위원은 1974년 4월 19일 국곡교회를 방문하여 당회원을 만나 노회에서 소천섭 씨를 제명한 사실과 국곡교회를 권면하여 노회에 순종하도록 수습결의한 것을 알리고 유혹된 길에서 돌이켜 본 장로회의 신앙을 회복하도록 권면하니 이미 굳어져 완강히 거부하고 권면을 듣지 않으므로 오랜 시일을 조용히 경과하여 그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하고 돌아온 보고를 받았다. 또 노회에서 극동방송의 정체를 밝혀 줄 것을 총회에 건의키로 했으며 극동방송의 "은혜의 아침 " 방송담당자 권신찬씨에 대한 태도를 밝혀야 한다는 헌의서를 올렸다. 구원파는 한국 평신도복음회로 간판을 걸고 오는 도중 기독교복음침례회로 개칭(81.12.6)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다시 국곡교회가 우리 노회 산하에 들어와서 함께 복음사업에 동참하기를 기대해 본다.

그러나... 지금 국국교회는 없다. 그리고 국화가 많은 마을, 또는 국싯골로 불리워지던 그 마을엔 지금 골프장 여럿이 들어 섰다.


 

청송탐방

소싯적에 들었던 청송은 꿈의 고장이었다. 의성에서 3시간이나 산골로 산골로 들어간다는데 거기 가면 달기약수란 게 있어서 그걸로 밥을 지으면 밥이 파랗다고 하는... 거길 다녀 온 사람들의 말은 전설이었다. 어째 거길 다 다녀 왔노...하는 감탄과 함께. 더구나 주왕산의 멋진 모습은 과연 산신이 사는 것 같더라...하는... 그러나 대학 시절에는 청송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청송보호감호소는 사람이 살 곳이 못되는 고장으로서의 청송을 생각케 했다. 이런 청송이 요즘에는 대게를 먹으러 영덕에 가면서 잠깐 들리는 휴게소처럼 되고 말았다. 청송은 동으로 영덕, 서로 안동, 남으로 영천, 북으로 영양과 이웃한다.

청송낙동정맥의 영향으로 동·남·북부가 산악 지형이며, 동쪽으로 주왕산(721m)이 있다. 고추사과가 주산물이다. 군청 소재지는 청송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7면이다. 청송군내 도처에 산악이 솟아있으며, 특히 동쪽은 낙동정맥, 주왕산 등 험한 산악지대로 영덕군, 포항시와 이웃하며, 남쪽은 보현산맥영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보현산맥의 지맥인 삼도산맥이 군의 중앙을 횡단하여 동서로 흘러 연행산을 뻗어 안동시와 경계를 이룬다. 용전천은 부동면부남면에서 흐르는 지류를 합하여 청송읍파천면을 경유하여 영양에서 진보면을 지나 임하댐으로 유입되는 반변천과 합류한다. 보현 산맥에서 발원한 보현천은 현서면안덕면을 경유하여 현동면을 관류하는 지류를 합하여 임하댐으로 흐르고 있다. 지세는 대개 동서 북방으로부터 남으로 뻗어나가면서 경사가 지고, 토양은 경질양토에 속하여 대체로 척박한 편이다.

우리는 안동 일직에서 의성 후평을 거치는 79번 국도를 타고 점곡에서 914번 지방도를 탔다. 이후 길안을 거쳐 곧장 청송으로 갔다. 청송에서 31번 국도를 타면 포항으로 가는데 이 길 옆에 청송자연휴양림이 있다. 청송군 부남면 대전리다. 여기서 2박을 했으며, 아울러 주산지와 주왕산을 돌아보았다.

주산지(注山池)는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에 있는 저수지이다. 주산천 지류의 발원지이며, 주왕산국립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2013년 3월 21일 명승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주산지는 조선 숙종 때인 1720년 8월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경종원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주산지 입구 바위에는 영조 47년(1771년) 월성이씨 이진표(李震杓)공 후손들과 조세만(趙世萬)이 세운 주산지 제언(堤堰)에 공이 큰 이진표 공의 공덕비가 있다. 저수지는 그리 작지는 않지만 입구가 협곡이며, 축조 당시 규모는 주위가 1천1백80척 수심 8척이라고 전하며, 수차의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는 제방길이 63m, 제방높이 15m, 총저수량 105천 톤, 관개면적 13.7㏊이다. 주산지 맑은 물은 주산현(注山峴) 꼭대기 별바위에서 계곡을 따라 흘러 주산지에 머무르고 주왕산 영봉에서 뻗친 울창한 수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준공 이후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고 호수에는 고목의 능수버들왕버들 20여 그루가 물 속에 자생하고 있다.

주왕과 장군의 전설이 곳곳에 배어있는 주왕산은 청송군과 영덕군에 걸쳐있는 국립공원이다.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선 산세 때문에 예부터 석병산, 대둔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주왕산은 대전사에서 제3폭포에 이르는 4㎞의 주방천계곡이 볼 만하다. 청학과 백학이 다정하게 살았다는 학소대, 넘어질 듯 솟아오른 급수대, 주왕이 숨어있다가 숨졌다는 주왕암, 만개한 연꽃 모양 같다는 연화봉, 그리고 제 1, 2, 3폭포 등 명소가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다

주방천의 백미는 학소대부터 1폭포까지, 학소대부터 1폭포에 이르는 길이 주방천에서 가장 아름답다. 2폭포와 3폭포가 있지만 규모나 폭포를 감싼 바위들의 형국으로 보나 1폭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1폭포는 폭포의 규모가 작은 편이다. 그러나 이 폭포를 감싸고 돌아나간 바위들이 예술이다. 마치 바위들이 비밀의 문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다. 그 사이로 선녀탕과 구룡소를 돌아 나온 계곡물이 새하얀 포말을 내뿜으며 바위 허리를 껴안고 쏟아져 내려온다. 주방천 계류와 폭포, 소, 담, 그리고 죽순처럼 솟아오른 암봉 및 기암괴석, 여기에 울창한 송림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절경을 빚어낸다.

주왕산은 태행산, 관음봉, 촛대봉 등 여러 산봉들 외에도 주왕굴, 무장굴 등의 굴과 월외폭포, 주산폭포, 내원계곡, 월외계곡, 봉산못, 구룡소, 아침 햇살이 바위에 비치면 마치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병풍바위, 등도 명소이다. 주왕산의 11경은 기암, 자하성, 백련암, 주왕굴, 시루봉, 급수대, 학소대, 연화굴, 향로봉, 복암 폭포, 좌암 등이다.

주왕산에는 대전사와 광암사 등 유서깊은 사찰을 비롯해서 주왕암과 백련암 등이 있다. 대전사에는 사명대사의 진영과 당나라 장군 이여송이 사명대사에게 보낸 친필 목판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주왕산 인근에 있는 달기약수는 옛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청송읍내에서 주왕산 쪽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이 약수는 설탕을 뺀 사이다 맛이 느껴지는 탄산수인데, 위장병, 만성부인병, 빈혈 등에 효험이 있다고 해 찾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이 약수로 지은 밥은 파르스름한 빛깔을 띠며, 영계에다 옻나무껍질을 넣고 이 약수로 삶은 옻닭요리는 이 고장의 별미다.대전사(大典寺), 주왕암이 있음. 주왕굴을 중심으로 남아있는 자하성의 잔해는 주왕과 고려군의 싸움의 전설이 깃들여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주산지를 들러 보고 인근에 있는 930번 지방도를 타고 동쪽으로 가면 옥계계곡을 거쳐 영덕읍이나 강구항이나 남정면으로 갈 수 있는데, 남정면에서 포항이 매우 가깝다. 산골이기 때문에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 청송맛집: <신동양식당> 약수백숙 청송읍 부곡리 278-1/ 054-873-2172, <대망식당> 청국장 청송읍 월막리 345/ 054-874-4559, <시골식당> 버섯전골 청송읍 월막리 225/ 054-873-9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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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지호준 안동대 교수, 백혈병 투병중 중환자실서 논문 지도

대학생 경제논문 30주년 / 특별상 받은 교수 2명

 

 

이라는 제목으로 매경신문에 수록된 기사를 보았다.

 

얼마나 오래간만에 공식적인 곳을 통해서 접하는 지호준 선생님의 소식인가?

 

언제나 나의 마음속에 계신 영원한

청출어람청어람의 말씀을 해 주신 선생님이시다....

 

 

오늘 보게 된 교수님의 소식을 링크해 둔다.

 

 

[매경신문 기사 보러가기]

 

 

故지호준 안동대 교수, 백혈병 투병중 중환자실서 논문 지도

김영세 연세대 교수, 학술동아리 이끌며 수상자 23명 배출

  • 이윤식 기자
  • 입력 : 2015.12.10 17:14:43   수정 : 2015.12.10 20:31:18

 

◆ 대학생 경제논문 30주년 / 특별상 받은 교수 2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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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 대학(원)생 경제논문은 지난 한 세대 동안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국내 첫 번째 언론사 경제논문인 본 대회는 지금까지 17명의 심사위원이 참여했다.

수상자를 배출한 대학도 53개에 이른다. 소속 대학 등 평가에 논문 외 요소를 배제해 공정성을 높인 결과다. 수상 논문은 267건인데 팀 단위 공동 작성이 많아 수상자는 438명에 달한다.

30년 세월 동안 다양한 이야기도 남겼다. 본 대회에 얽힌 고(故) 지호준 안동대 경영학과 교수의 헌신이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줬다. 지 교수와 대학 동문인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지 교수는 유능한 학생들이 지방대생이라는 이유로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했고, 실사구시와 동떨어진 경제·경영 교육 현실을 안타까워했다"며 "그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매일경제신문을 통해 해결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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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교수에 따르면 지 교수는 학생들에게 매일경제신문을 읽도록 하고 강의 전에 학생들과 신문에 나온 내용으로 토론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매경 대학생 경제논문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자신도 여름방학을 이 학생들 논문 지도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 매경 대학생 경제논문에서 1997년부터 1999년까지 3년 사이에 5명이 당선되는 쾌거를 거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 교수는 백혈병으로 2003년 세상을 떠났다. 지 교수는 서울 아산병원에서 골수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을 때 학생들 논문을 꼭 읽을 수 있게 해달라고 병원에 특별요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신 교수는 "논문이 멸균 처리돼 환자실로 들어간 것은 아산병원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소개했다.

김영세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제자 중 23명이 매경 대학(원)생 경제논문 대회에서 수상했다. 이 공로로 김 교수는 경제논문 30주년 특별 감사패를 받았다. 김 교수는 "경제 학술 동아리 학생들에게 매경 대학생 경제논문상을 목표로 논문을 써볼 것을 권해왔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16년째 교내 학술동아리 JSC(Junior Scholar Club) 경제분과 지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JSC 경제분과는 매 학기 2~5명만 뽑을 정도로 선발 과정이 엄격하다.

김 교수는 "3학년 2학기부터 논문 작성을 시작하는데, 학생들은 매경 대학생 경제논문상을 준비하며 자기가 공부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자신감도 많이 갖는다"고 말했다.

장대환 매경미디어그룹 회장은 10일 서울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매경 대학(원)생 경제논문대상 30주년 기념식장에서 이런 공적을 기려 고 지호준 교수와 김영세 교수에게 특별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윤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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